조지훈 선생님 산문


대학 동기들 카페에 경북 영양의 조지훈문학관이 올라왔다. 고인의 흉상과 사진, 돌에 새겨진 싯귀들과 함께 문학관 마당에 서 있는 학우들의 모습들이 낯익었다. 일월면 주실마을에 세워져 있는 조지훈문학관. 누군가가 탐방을 제안하고 다른 누군가에게서부터 사발통문이 돌더니 문득 방문단이 급조된 모양이었다. 옛 은사의 고향을 찾아 활짝 웃고 있는 모습들이 반세기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들이 겹쳐져 애늙은이인지 중늙은이인지가 분간키 어려웠다.

입학 당년부터 시론이 개설되었지만 강의는 매번 한두 주를 채우기도 전에 휴강으로 이어졌다. 60년대의 대학가는 한일 굴욕회담 반대 데모에서부터 반독재 반정부 투쟁이 끊이지 않았기도 하지만 유독 선생의 강좌는 휴강이 잦았다. 이미 건강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졸업 무렵 3층 강의실로 향하던 선생이 2층 계단에서 문득 걸음을 세우고 물었다. “강의실이 어딘가” “302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선생은 2층 계단 끝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휴강이야하고 돌아섰다.

1968517일 선생은 홀연 타계했다. 향년 49. 학부 4년이 허전하고 민망하여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과의 조교를 맡고 있던 때였다.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의 장례식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학계의 다양한 인사들은 물론 당시의 주요 정치인들과 정부 요로의 인사들의 면면들은 시인이자 국학자이자 당대의 대표적 논객이었던 고인에 대한 경의와 애도의 정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선생이 마석에 운구되어 관이 서서히 묘혈 쪽으로 안착할 즈음 누군가가 소리치며 뛰어내려 관을 부둥켜안았다. “지훈! 지훈!” 교육학개론의 왕학수 교수였다. 어린 아이 같은 그의 통곡에 관의 한쪽 끝줄을 붙들고 있던 나도 함께 울었다. 하관식은 소란스러웠으나 슬픔은 묘혈보다 더 깊었다.

선생에 대한 일화가 많다. 생일 축시를 써 달라는 자유당 당국의 청탁에 독재자의 만수무강을 빌라는 말인가고 거절한 사건, 자신이 주관하던 시인협회의 수상을 반납하고 상금 많은 정부기관의 상으로 바꿔 탄 시인을 구타한 사건, 전시 중 종군문인단의 전방 위문방문 자리에서 취한 문인들의 모습에 분개한 소대장이 총부리를 들이대자  “호국은 자네들만 하는가며 외려 격분하여 그 젊은 장교의 따귀를 때린 사건, 여촌야도의 선거판에서 단 한 석의 공화당 당선자가 아쉬웠던 시절, 여당 수뇌부의 집요한 출마권유와 회유를 폭언으로 거절한 사건, 그러면서도 통일이 되면 찾아오실 납북된 부친 때문에 이사를 갈 수 없노라고, 죽어서는 어머니 누워계신 마석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는 마음 여린 시인... 모두 기담처럼 들리던 일화들이다. 선생의 민족적 우국적 시편들은 그의 풍류와 정서에 잘 어울렸고 그가 이룩한 국학의 학문적 성취는 학자와 지사적 풍모에 잘 어울렸다.

지근거리에서 선생의 기침소리를 접하기는 어려웠던 시기, 여럿이 어울려 성북동 자택을 찾으면 막걸리를 내놓으시거나, 고전을 논하고 시국을 걱정하거나 했던 모습 외에 그에 관한 추억은 소루하다. 내년이면 선생의  탄신 100주년이다. 선생은 늘 부재중이었지만 강의는 언제나 진행중이었음을, 삶의 지혜나 용기는 그것을 들려주기보다는 보여주는 것임을 이제는 알겠다. 내일신문, 2019.5.15.


김호득, 먹의 행로 갤러리

김호득의 최근 전시(학고재, 2019.3.6.-4.7)에 보인 작품들은 동양화 혹은 수묵의 주제와 소재, 질료와 형식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 있었다. 관념적 실경산수의 디테일에 매달렸던 전통적 방식을 넘어 무겁고 두꺼운 먹선들이 광목 위에서 흐르고 번지고 뒤틀리고 꺾인다. 일필휘지 혹은 기운생동하는 붓의 이행이 역동적이었다.

흐름(2018)은 두 개의 굵은 선이 마주보듯 혹은 끊어지듯 횡으로 이어져 있다. 그 선은 끊어지거나 대칭을 이루면서 생겨난 먹물들이 날카롭게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두 선은 자연에서 출발했다. 공중에서 확 지나가는 바람의 흔적으로 형상화했다. 물이라고 봐도 산기슭이라고 봐도 좋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설명도 군더더기일 것이다. 그 두 개의 선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미지란 물도 아니고 산기슭도 아닌 그 무엇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략, 압축, 단순화한 먹선의 행로는 어떤 기호나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가 애매할수록, 대상에 대한 재현성의 정도가 낮을수록 오히려 지시할 수 있는 의미가 넓어지는 역설이야말로 메타포가 작가나 관람자 모두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작가가 제시한 점, , 면들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상상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기호이거나 상징일 수도 있는 두 개의 선이 지시하는 바는 관람자의 심상에 따라 달라진다. 두 개의 먹선이 무엇을 지시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어떤 수긍이나 동의로 전이되는 순간의 심미적 체험은 경이롭다. 새의 날개짓이나 곰의 발자국이 숲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듯이 한 작가의 붓의 행방은 그의 정신의 행로와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화가의 붓놀림은 작가 자신의 관념이나 그 유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양정신 혹은 문인화의 어떤 맛과 멋이기도 할 것이다.

 흐름」은 마음의 흐름이. 두 선의 흐름에서 비장과 결연, 단절과 소통, 대립과 화합과 같은 복합적인 심미적 긴장을 유도하게 된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사물은 오래 들여다보면 하나의 점이나 선으로 축약되는 것일까. 화가들은 유난히 인간과 사물과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들인데, 결국 그들이 드러내 보이는 것은 풍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임을 알겠다. CULTURA, 2019.05

* 김호득, 흐름, 광목에 먹, 159x248cm, 2018


꽃비로 오는 4월 산문

산야에 봄기운 넘치고 만화방창이다. 겨울과 봄의 간이역, 얼어붙은 땅 길고 어두운 터널 지나 신록으로 가는 4월의 길목에서 사람들은 소생의 질서와 신비에 환호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계절의 변화와 경이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푸는 신성의 하나일 것이다.

이 자연의 풍경들은 그러나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그것들을 바라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 하나의 해석된 풍경으로 변화한다. 풍경은 그래서 정의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우리 앞에 도열한다. 서양의 어느 시인은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봄비로써 잠든 뿌리를 뒤흔드는일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저주라는 것. 소생에서 소멸을 보는 시인의 절망감은 곧 현대문명의 황폐화에 대한 역설일 것이다

우리에게 4월은 유례없는 생령 수난의 계절이다. 4.3, 4.19, 세월호 - 고통과 환희와 절망의 시간들로 얼룩져 있다. 그리하여 제주의 어떤 화가에게 4월은 동백꽃 지꽃비내리는 슬픔으로 묘사된다. 어떤 시인의 4.19알맹이만 남고 껍떼기는 가라고 외치게 했고, 어떤 노래는 천 개의 바람이 된영혼으로 여객선 침몰 희생자를 추모했다.

꽃비껍데기바람은 작가나 시인들이 자연에서 찾아낸 비유이다. ‘꽃비는 비가 꽃잎처럼 흩뿌리듯이 내리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꽃잎이 비가 내리듯 지상에 뿌려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풀이한다. 비 오듯 지는 꽃이나 꽃처럼 떨어지는 비를 두루 가리키기도 하는 이 어휘의 다의성이 재미있다. 제주의 그 화가에게 4월은 동백의 꽃대가 문득 잘려 떨어져 꽃비로 흘러내리는 계절, 자연이 역사가 된 풍경이었다. 초록의 이파리와 함께 진분홍으로 떨어지는 목 꺾인 동백 한 송이는 제주 4.3의 은유적 색채였다. 그 선연한 핏빛 동백은 상황의 비극성과 처연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화가가 그리는 4.3은 대체로 칙칙하고 무겁고 거칠지만 대상에 대한 외경심이나 경건함은 무겁다. 그가 그리는 하늘은 유난히 높고 넓으며 구름들은 화면의 구성에 따라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의 크기로 떠 있다. 하늘은 어스름에 차있고 빗물은 비애처럼 흐른다. 검은 하늘과 누런 구름은 대지의 질서 혹은 한 생의 장엄한 일몰을 상기시켜 준다. 그가 그리는 북촌의 팽나무와 한림의 까마귀들은 4.3의 슬픔으로 전이된다. 이처럼 작품 속의 자연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풍토나 역사에 관련지어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진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4월은 꽃비로 내린다고 말한다 . 4월은 화사하지만 꽃비는 슬프다. 화사한 비탄으로 떨어져 내리는 꽃비의 역설은 마침내 광장을 가로질러 내닫던 젊은 생명력으로 전이되며 또한 그것은 거대한 여객선의 동체 안에서 암흑의 물길 속으로 침몰해가던 어린 생령들의 절규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생성과 부활의 4월에 소멸과 절망을 보는 역설의 계절이다. 자연의 책은 우리에게 생성과 소멸 혹은 시간의 순환 원리를 가르쳐주지만 그것들은 보는 이의 번역에 따라 흐트러진 모습은 하나의 형식을 갖추게 될 것이며,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이나 도심의 먼지나 광장의 시위대의 풍경들은 관찰자인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시 번역되고 해석될 것이다. 은유는 세계를 읽어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작가나 시인이 한 줄의 은유를 만들기 위해 기울인 열정만큼이나 그것들을 읽어내는 유추적 사고 또한 중요하다. 상황에 대한 표현의 우회성이 비유나 상징의 덕목이듯이 대립에서 타협으로의 이동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대응해야 할 정치의 기본 자질일 것이다. 직설과 반목의 언어는 비유로써 비로소 승화된다. 

4월은 꽃비로 온다. 그림 속의 꽃이나 시 속의 바람에서 4월을 읽어내는 심미적 과정은 그러므로 슬픔이나 분노를 여과하기 위한 우리들의 또 다른 자기 구원의 방식일 것이다. 내일신문, 2019, 4.10


하노이 회담을 보는 눈 산문

이번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은 미국 측의 배반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여러 차례 실무협상 끝에 이루어진 두 정상 간의 만남이 양측의 잠정합의 사항에 대한 확인과 추가적 조치들에 대한 검인증이라는 그동안의 국제관례가 무시된 때문이다. 일괄타결과 제재 일부해제 사이의 오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측 주장이 상충하고 있다. 회담재개 가능성을 열어놓아 핵단추 설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 예단은 더 어려워졌다.

일괄과 단계는 과정의 차이일 뿐, 문제는 신뢰였다. 이번의 회담 결렬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전 65년과 근대 이후의 남북미의 관계사를 돌아보게 한다. 북측의 그동안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반 사례들이야말로 오늘의 상호 불신을 부추기는 원인제공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남북연방제를 제기하면서 대남 공작을 강화했고 7.4성명 이후에 땅굴을 팠으며, 83년 남쪽의 신군부를 향한 아웅산 테러, 민족단합 5개항 발표 후의 KAL기 폭파, 소뗴 방북 이후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동해안 잠수정 침투, 월드컵 축제 중에 벌어진 서해교전 등, 우리가 기억하는 그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는 오늘의 북측의 협상력 약화와 함께 협약이행 의지를 담보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불신의 근거들일 것이다. 그것들을 선군정치의 과거의 유물로 돌리기에는 너무 궁색한 자기변명일 것이다.

회담결렬의 원인제공자로서의 북측의 그동안의 수많은 위반 사례가 떠오르는 한편으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과거에 대해서도 따져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유엔과의 혈맹 70년사는 6,25 참전 16개국 중 50여만 명의 파병에 5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미국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먼 나라 동방의 작은 반도에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한 그들 참전 용사들의 희생은 우리가 오래 새기고 갚아야 할 감사와 숭고의 표징일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경외와 연대의식은 우방으로서 그들이 보여준 자유이념과 물질적 시혜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방이었던 미국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간의 넘치는 자국 우선주의 사례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용인하는 미국과의 묵계가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고, 애치슨 라인은 한국을 라인 밖으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의 남침을 위한 장애물을 제거해준 셈이 되었으며, 4.3의 제주는 미군 당국에 의해 "red island"로 명명되면서 참극은 가속화되었으며, "혼란"과 "미완"의 4.19혁명은 "안보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묵인한 5.16을 가능케 했으며 이 시기의 미국 외교 기밀문서는 모두 공개불가로 봉인되어 있다. 1971년 키신저와 주은래와의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으로 이익을 공유하기로 합의한 기록은 놀랍기만 하다. "미국 정부, 공수여단 광주시민 폭행 결정 알면서도 지지" 라는 미국 학자의 5.18관련 미국무부 비밀해제 문건 인용은 검증을 기다리고 있다. 한미 관계사에 검증이 필요해졌다. 그동안의 미국의 묵인과 방조와 침묵의 몸짓에 대해 우리가 일희일비하는 것 또한 또다른 식민근성일 뿐이다. 그 반대의 이유로 냉정한 검토는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과 미국측의 과거사는 한반도에서의 근현대사를 위반과 배반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남게 했다. 북한과의 대치를 민족의 이름으로, 미국과의 이해충돌을 우방의 이름으로 대체 가능한 것인지 다시 자문해야할 시간이다1918년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3.1만세를 고무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한국은 "완전하지 않은 국가들(식민지)"로 분류하여 회의참가를 제한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2019년 하노이에서 손 털고 일어나버린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협상테이블로부터의 이탈은 평화는 승자가 없어야 한다는 잠언에 대한 의문이었다. 남북미의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증간자적 존재로 자처하는 것은 이제 분단시대의 재앙이다. 내일신문, 2019.3.18


박은용의 굴곡진 삶과 예술 갤러리

지금 광주에서는 10년 전에 스스로 세상과 결별했던 박은용의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석현 박은용 - 검은 고독 푸른 영혼. 지난해 126일부터 210일까지의 전시에 이어 다시 310일까지 연장 전시로 이어지고 있다
    박은용(1944-2008)은 남종화의 본향인 진도에서 출생, 일찍이 독창적인 적묵법과 세련된 구도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기법을 선보이며 화단을 압도할 발군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첫 개인전(1983)에서의 청옥동풍경이나 어머니의 땅시리즈나 일련의 농가의 풍경들은 단연 한국 동양화의 전통과 창조의 두 모습을 함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붓에 먹물을 스치듯 지나가는 청전의 방식이나 밭이나 산, 땅을 묘사할 때 점으로 찍어대는 소정의 방식을 혼합하여 먹물의 농담에 따라 층을 쌓아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의 묘사법을 선보여 관람객을 놀라게 했다. 산천풍경을 펼쳐보이는 청전의 사실성과 산 너머로 내려다보는 소정의 산수풍경을 융합한 기법은 서양화적 발상과 사실주의적 이념이 결합된 박은용만의 미적 성취로 지적되고 있다(이일영,천재화가 석현 박은용과 잃어버린 꿈). 요컨대 안개처럼 아슴프레한 산수풍경이나 서정성 넘치는 들판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인 토지의 모습, 우리가 깃들어야 할 삶의 품으로 현재화하였다는 점에서 선배 작가들과의 차이를 드러내준 조형미였다. 필법이나 이념 모두에서 기왕의 관념 중심의 동양화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적 삶은 수차례의 정신병원 수감 치료와 극도의 가난과 병고로 이어진다. 박은용의 굴곡진 삶은 그의 가족사의 참극과 동기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일곱 살 유년에게 부모 형제가 위해 되는 참극을 현장에서 목도케 한 전쟁이 있었고, 돈 덜 드는 붓과 먹에 의존하는 동양화로 전향할 정도의 극한의 궁핍이 있었고, 정신병동과 작업실을 오가면서 맞이한 이혼이 있었다. 마침내 정상인과 실성인의 경계마저 무너져버릴 때까지의 그가 맞이한 수난은 비탄과 상실의 연속이었다

첫 여인과 결별하고 제자이자 동업의 촉망받는 화가였던 두 번 째 아내와의 만남은 그의 또다른 출발을 예고하였지만 고통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었다. 젊은 아내의 재능과 야망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고 당장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들은 교외에 작업실을 만드는데 오래 몰두했다. 이 시기의 박은용의 그림이 변했다. 굵은 먹선으로 농가와 동네의 일상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적묵의 필법에 따르는 엄청난 시간과 세밀성에 그의 육신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때문이었을. 그러나 그보다는 디테일에서 벗어나 대담한 생략과 채색을 개입시킴으로써 화면의 서사 동력이 살아나고 작가의 본래적 심상과 민중적 사고가 분출되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원경으로 처리되곤 하였던 농가의 풍경 속 인물들이 일상적 삶의 현장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생활고, 병고, 착란에 지쳐 있었다. 2008년 구월, 그는 오래 작업해 오던 화순의 두강화실에서 문을 잠근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박은용과 오래 교유했던 후배 작가 박종석은 그의 평전에서 비탄, 처절, 창조라는 단어로 비운의 선배 작가의 삶을 회고했고 진정한 남종화의 창조적 계승자로 그를 지목했다. 박은용은 우리에게 고단한 삶과 예술적 성취의 존엄을 함께 보여주었다. 우리가  타인의 상처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보다는 아마도 함께 아파하기 위함일 것이다. 상처는 한 예술가의 창조의 원천이자 존재의 근거일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해석적 관점을 보는 관람자와의 관계는 또다른 역설이다,   CULTURA,2019,03


* 새벽의 씨 뿌리는 여인, 수묵담채,125x70cm,1982

**휴식,수묵담채,62x46cm,1982

***수박 사려,수묵담채, 59x70cm,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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