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는 오지 않는다 산문

6.13 지방 선거에 참패한 야당이 원인규명과 위기탈출 방안에 고심하고 있다. 리모델링인지 재건축인지 모를 사태로 이어지는 각 당의 요즘의 풍경은 하도 자주 반복되는 것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심사는 이제 씁쓸하지도 우습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때마다 정치란 무엇인가 새삼 되묻게 되고 나와 우리가 사회와 역사 속으로 어떻게 편입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타고온 버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지금 가고 있는 속도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다시 자문하게 된다.

야당의 참패에는 저마다 이유도 많고 치유방법도 백가쟁명이다. 한 야당은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무능 부패 정권의 몰락을 자신들과 분리해서 선거에 임하는 우를 범했다. 무엇보다도 일부 당직자가 보여준 일련의 정치적 행보나 발언들은 시대착오적이었고 군부독재 시절의 정치 사회적 관습에 자신을 가둬버린 현실인식 방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 일부의  정치적 발언은 자신들의 품격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념과 신념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보수와 수구, 친북과 종북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당적을 같이 했던 또 다른 두 야당은 자신들이 왜 갈라서야 했는지에 대한 명분도 철학도 제시하지 못한 채 적폐와의 연대와 단일화를 얘기했다. 촛불 정국을 이루어낸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던 그들은 국민들로부터 퇴출당했다.

국정농단과 비리정권의 누더기를 걸쳐 입은 이 거대야당은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 진보도 보수도 혁신도 아닌 또 다른 야당 역시 응급실에 누워 수혈을 기다리고 있다. 다급해진 그들은 여기저기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아예 자신들을 도와즐 책사들을 호명하고 있다. 청년 실업을 걱정하고 업무를 기획해야할 그들 자신에게 때 아닌 일자리가 창출된 셈이다. 세간의 책사로 분류되는 몇몇 인사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구원투수로 입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고 자신들의 정권을 탄핵했던 인사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심지어는 정치와는 무관한 유명 의사를 비대위원장으로 거론하는가 하면 아예 자신의 당과는 수혈 불가능한 혈액형의 학자를 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자고도 했다. 전문적인 의술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 학자의 지식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이 구애는 지금의 그들의 절박함이 어떠한 지경인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기술이나 지식이 언제나 지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지혜야말로 경험의 축적물이요 그것은 지식과 식견의 차이만큼 중요한 덕목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애타게 찾고 기다리는 멘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쓴 사도의 계시록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예언가의 점괘라도 받아 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삼국지의 장수처럼 자신을 도와줄 책략가를 다시 삼고초려 하겠다는 것인가  왕과 세자의 난치병을 고쳐낸 조선조의 명의가 다시 현현하기를 기다리자는 것인가.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폭력과 전쟁의 황폐를 시대 배경으로 플롯도 스토리도 무대장치도 없이 황량한 한 그루 나무그늘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들은 다만 고도씨를 기다리는 것으로 아득하게 앉아있다. 그들의 하는 일이란 고도가 올 것을 믿는 일과 무연한 수다로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고도는 다만 그들의 기다림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선지자인지 구원자인지 극중의 기다림의 대상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상황의 완고성과 지속성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처한 희망과 절망의 역설적 병행원리이다..

멘토는 오지 않는다. 그는 전쟁터에 나간 친구의 아들을 아비처럼 스승처럼 보살펴주고 사라진 신화 속의 이름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진정한 멘토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손님, 새로운 어떤 신념이나 가치이어야 한다. 내일신문, 2018.7.10


불가역적 '역사와의 약속' 산문

북미정상이 6.12회담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두 나라는 평화와 번영에 부합되게 새로운 관계 설립과 지속,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노력하고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노력하는 한편 신원 확인된 전쟁포로 및 실종자의 유해 송환에 약속했다. 4개의 포괄적인 조항으로 짧게 구성되어 있지만 무겁고 긴 내용들로 채워진 것이었다. 북미합의에 남북합의를 끼워 넣었으니 사실상 남북미 3개국의 합의문인 셈이다.

북미 두 정상은 비록 번갈아 가슴 맞대는 삼단 포옹을 연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유유서와 프랜드십에 걸맞는 예절로서 악수하고 어깨와 등에 손을 댔다. 그들은 서로를 치켜세웠으며 이날의 우호적 관계와 합의 사항 실천을 위해 상대국으로의 방문이나 초청의사를 주고받았다. 단독회담 중 각각 측근을 불러 일이 생길 때마다 직통할 수 있도록 서로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기도 하였다. 회담 후 기자 회견에서는 한쪽 정상이 다른 한쪽의 핵 갱도 폭파에 대한 답례라도 하듯 빈 산이나 바다 위에 비싼 포탄을 쏟아 붓는 전쟁놀이에 불과한 군사훈련을 당장 중단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울러 파견한 자국 군인들의 철수나 감축도 생각해야 할 때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역사의 필연인지 우연인지, 거듭되는 돌발 상황과 반전의 드라마가 펼치는 지금의 평화지도와 한반도의 지각변동이 경이롭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자신의 책상에 핵단추가 놓여있으며 언제라도 그것을 누르기만 하면 상대국의 심장을 강타할 수 있다고 호언하던 꼬마 로켓보이‘이거나 늙다리‘였던 그들. 회담이 열리기 직전에는 측근들에 대한 비난을 빌미로 한쪽이 회담 취소를 전격 통보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좀처럼 믿기지 않은 이 모순되고 불합리하기조차 한 역설의 계절, 전쟁발발 68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반도의 남북회담을 시발로 하여 지금 각국은 다양한 의제의 회담준비로 들썩이고 있다. 북중 북미에 이어 북러 북일회담이 추진되고 있으며 당장 한러회담이 잡혀 있다. 국외의 바쁜 움직임보다 더 빠르게 국내의 실무회담은 그야말로 봇물이다. 남북 군사회담에 이어 체육회담·적십자회담과 철도·도로 연결, 산림협력 회의가 잇달아 열린다. 철도·산림 분과회의에 이어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설치 준비 인력이 방북한다. 개성공단에 설치하기로 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이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남북이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4·27 판문점 선언 이행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직 일부 의심 많은 냉전과 수구적 사고에 은둔하고 있는 세력들로부터의 환상적 민족주의종북이니 하는 비아냥도 끊이지 않고 있고, 협의문의 자구에 매달려 회담의 성과를 폄하하거나 과거의 약속파기 사례들을 들어 비관론을 펴는 전문가들의 예단도 있다. 그러나 그날 6월의 젊은 지도자는 말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왔다.”

회담장에서의 젊은 지도자의 첫마디는 과거에의 회한과 현재의 고심을 짐작케 하는 언사로 보였다.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의 결별을 예고하는 외교적 표현을 구사했다. 그들은 전략적 인내를 버리고 화염과 분노로 대응하겠다는 지금의 미국에 굴복한 것일까, 남측의 평화공존의 진정성을 수용한 것일까. 그것은 굴복이기보다는 이성적 결단의 소산이기도 하고 남측의 진정성에 대한 화답으로도 치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손가락 내밀어 걸어보는 이 유월의 약속을 추인하자. 약속이 역사가 되는 길에 부합된다면 그것은 실행되어 마땅하다. 약속을 받아내는데 걸렸던 시간이 오래고 지난했노라고 비난하지 말 일이다. 약속이 쉽지 않았던 것은 그 실행에서 그만큼의 충실을 담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항복문서 아니니 CIVGCIVD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역사와의 약속일 터이다. 내일신문, 2018.6.18


도보다리의 마임극 산문

남북이 만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민족의 공동번영과 미래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과거의 합의는 조속히 실천에 옮기는 한편 남북 철도를 연결하고 이산가족의 상봉 추진은 물론 일체의 충돌과 적대행위를 금하고 특히 핵 없는 한반도를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노력해나가자는 등의 합의문이었다.

남북은 이제 각각 따로 재깍거리던 서울과 평양 두 개의 시계를 하나로 맞추기로 하였으며, 철조망 너머로 마주보던 확성기를 떼 내고 양국 정상 간의 직통전화도 개설하였다. 북미는 북미대로 핵단추를 누가 크게 누를지 두고 보자던 태도가 급변, 억류했던 인질을 풀어주고 판문점에서 만날까 상그리라에서 만날까 고민하는 사이 핵 실험장 폐기를 위한 갱도 폭파 현장을 참관하라는 통보가 뒤를 이었다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변화다.

이 상황은 427일의 이른 오전 남북의 두 정상이 처음 만나 악수하고 잡은 손을 끌어당겨 번갈아가며 남북의 군사분계선을 무단 월경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면서부터 이미 예고되었다. 그동안의 시행착오 때문일까. 이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2018년의 봄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 사실로 굳어지지나 않을지 두렵기 조차 한 계절이다. 믿지 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조차도 비현실적으로 고맙기만 하다. 간밤에 내린 함박눈처럼 거짓말처럼 도둑처럼 봄은 왔고, 지금 녹음은 짙어가고 있다.

그 날 사월의 마지막 금요일,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도보다리에서의 두 정상의 산책 장면은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이 봄날의 또 다른 진경이었다. 그 도보다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곳은 바로 오래전 명명된 소떼 길의 길섶이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각인된 과거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 해 유월의 남쪽의 한 재벌 회장의 소떼 방북은 전쟁과 평화와 이데올로기 모두를 한 줌의 바람으로 날려버린 사건이었다. 소떼 500마리를 실은 트럭의 기다란 행렬의 선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 땅으로 향하는 밀짚모자 속 실향민 노인의 검게 탄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다. 어릴 적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훔쳐 들고 고향을 떠나온 그가 성공하여 마침내 서럽고 애잔한 그 빚 갚기 위해 그리운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분단시대의 영상이었다. 그 장면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의 퍼포먼스이자 어느 미래학자의 표현대로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 이를 만한 것이었다.

소떼가 지나갔던 20년 전의 그 깊섶 도보다리에서의 두 남자 주연의 35분간의 무성 영상은 한 편의 마임극이거나 단편영화였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드나드는 요원들의 동선을 줄이기 위해 습지 위에 만들었다는 그 다리가 마침내 남북의 동선을 줄이는 다리로 바뀌어가는 순간이었다. 배석자가 사라지고 기자와 카메라가 물러서고 움직임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카메라는 서서히 줌 아웃으로 밀려났다. 멀리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는 사월의 연두색 초목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주위에 들리는 것은 오직 새소리와 바람 소리 뿐, 나란히 한 두 남자의 어깨는 가끔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한 쪽은 설명하고 한쪽은 듣는 모양새였다. 한쪽이 말하자 한쪽이 안경을 고쳐 세웠고 한쪽이 손을 흔들자 다른 한쪽이 웃었고 한쪽이 웃자 다른 한 쪽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들은 순간순간 상대방의 머리 위를 스치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엿듣는 듯했다가 망연히 한 곳에 시선을 멈춘 채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마임극이기도 하고 무성영화이기도 한 도보다리의 롱 테이크는 장면이 의미에 가담하는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풍경 속의 두 남자는 조금은 고즈넉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들이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무슨 얘기를 하였는지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2018년 봄 도보다리에서의 두 남자의 이야기는 세월 흘러도 마임극으로 남겨둘 일이다. 길을 말하거나 이름을 명명하는 순간 그 길과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이 봄이 믿을 수 없이 즐겁고, 그림처럼 왔다가 음악처럼 흐르는 이 봄의 반란에 가슴 설렌다. 내일신문, 2018.5.17

 


판문점, 역사의 개그 산문

427일의 남북회담 장소인 판문점이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평양도 서울도 아닌, 남도 북도 아닌 이 어정쩡한 공간은 그 지리적 조건의 상징성으로 인해 의미도 더 커 보인다. 오늘의 분단과 대립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판문점은 부근에 널문 다리가 있고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회담이 널문리로 옮겨지고, 회담이 진행된 장소에 초가집 몇 채와 가건물, 막사와 주막이 있어 판문에 구멍가게를 뜻하는 이 붙었고 이것이 중국어 표기의 판문점이 탄생했다. 비무장지대(DMZ)나 공동경비구역(JSA)은 차라리 드라마의 제목으로나 더 애용되는 이름이다.

판문점을 생각할 때면 우리는 늘 슬픈 한국현대사의 회한과 비감에 젖게 된다. 6.25전쟁이 남긴 이 널빤지문 가게는 그 이름의 초라함에 비해 지구상에서 가장 긴 휴전기간과 지상의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의 오명을 보유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부터는 그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다. 영화나 소설에서 즐겨 다루고 있는 이 장벽들이야말로 정치이념이나 제도가 인간성 형성과 마모에 얼마나 깊게 침투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호철의 소설 판문점(1961)은 일상에 스며들어있는 분단현실의 단면을 재미있게 보여준 작품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이 작품이 꼬집고 있는 바는 생생하고 발랄하다. 소설 판문점은 남측의 기자 진수가 무슨 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에 취재차 나가서 겪었던 일들의 전말이다. 그 일들이란 취재 중 북측의 여기자와의 짧은 만남에서 주고받은 대화나 감상을 중심으로 이어지는데, 북측의 여기자와 남북 체제의 우월성을 다투거나 남북의 생활이나 교류에 호기심과 비판을 보이거나 하지만 사이사이에 남녀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스며든 지프차 안에서 여기자는 무슨 암시나 받은 것처럼 이북 가시죠, ? 이북 가시죠?”라고 월북을 권한다. 그러자 진수는 이봐 그 금니 어디서 했어?”라고 딴청을 부리면서도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에서 풍기는 '신 살구알 냄새를 맡고 몸을 떤다. 그들은 다투지만 싫지 않았고 논쟁하지만 수다뿐이었다. 그러나 두 세계의 이질감이나 단절감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함께 살고 있는 서울의 형님 부부의 속물적이고 자본적이고 권태롭기조차 한 일상이나 여기자로부터 듣게 되는 북녘의 경직되고 긴장된 일상 양쪽에 비애를 느끼는 그는 두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판문점에게 쫒기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남쪽의 사회적 혼란이나 북쪽 체제의 경직성 모두에게서 이역감을 감추지 못한 그는 다시 판문점을 찾아 북측의 여기자와 만난다. 여기자는 첫눈이 왔다고 말하고 얼굴을 붉히자 진수는 처음 만난 것 같군요, 다시 힘들어졌군요 라고 말하면서 미소 짓는다. 경계와 방어태세로 되돌아온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진수는 기집애, 조만하면 쓸만한데.” 중얼거리며 쓸쓸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이야기의 중간쯤에서 비몽사몽간에 판문점에 대한 자신의 몽상을 늘어놓는다.

2백년쯤 뒤 고어사전에서 판문점이란 .....1953년 생겼다가 19XX년 없어졌다. 여기에서 휴전 회담이라던가 군사 정전회담이라는 알 수없는 회담이 무려 5백여 회에 걸쳐 열렸고 그 회담기록이 적힌 거창한 문건이 지금 인류 역사의 기념비적인 익살로서 개성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이 해괴망측한 건물은 사람으로 치면 가슴패기에 난 부스럼 같은 것인데, 부스럼은 부스럼인데 별로 아프지 않은 부스럼이다. 그 원인은 부스럼환자가 좀 덜됐다 불감증이다 어수룩하다는 데 있다.....

판문점을 인류 역사의 '익살로 풍자하고 가슴패기의 '부스럼으로 비유했다. 그리하여 판문점에 무신경한 일상의 안일을 경계하는 작가의 시대의식을 보여준다. 6.25때 인민군으로 동원되어 동해안까지 내려갔다가 포로기 되고, 풀려나 단신 배를 타고 월남하여 부두노동자, 미군기지 경비원 등을 전전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예술적 성취를 가능케 한 자산인 셈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판문점은 공룡화되고 삼엄해져서 남북이 함께 소나기를 피할 공간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작중 인물 진수의 판문점에 대한 상상은 그래서 더 슬프고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의 우리는 부끄럽다. 맨 땅에 줄 그어놓고 이쪽과 저쪽이 마주하고 있는 판문점, 역사의 개그인 그 널빤지문 가게는 이제 유적지로 전환시켜야할 때이다. 내일신문, 2018.4.16


또하나의 촛불 '미투' 산문

지금 우리의 사계는 환절기의 언덕에 진입하고 있다. 어느 때이고 위기와 전환의 시기 아닌 적 없었지만 요즈음의 우리 사회처럼 그 징후를 실감할 수 있는 때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무능과 비리 정권이 탄핵, 단죄되는 한편으로 밖으로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기획되자마자 북중, 북일의 만남을 위한 물밑 대화와 움직임이 부산해지고 있다. 올림픽이라는 경기대회가 정치회동이라는 축제의 통합기능으로 이어지는 소중한 사례와 만난 것이다. 오랜 동안 중간자적 혹은 방외의 위치에 있던 우리가 모처럼 한반도의 역동적인 움직임의 주체로 자리 잡을 기회도 보인다. 불과 일 년 전 시작된 시민혁명이 새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최근 한 달 사이에 한반도의 정치기상도가 급변했다. 흥분은 금물이지만 고무되어 마땅할 움직임이다.

거기에다가 지금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미투는 이제 운동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광장의 촛불보다는 조용하지만 그 기운은 더 차갑고 매섭다. 계절 바뀐 것 모르고 지내던 이 땅의 모든 우월적 지위와 가부장들의 신변에 적신호가 켜졌다. 무심코, 그러나 전혀 무심코는 아니었을 과거의 한 순간이 고발자에 의해 재생되면서 소위 가해자와 피해자는 기억과 악몽의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그동안 은폐되었거나 방기되었던 신체적 접촉이 희롱, 추행, 폭행의 이름으로 폭로 고발되고 있으며 분쟁 당사자들의 해명과 사과,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던 일부 당사자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보는 이를 다시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품격은 위태로워졌고 어떤 국제적인 상의 후보나 권좌의 후보, 혹은 예술인이나 교직자로서 누렸던 명예나 지위는 문득 거두어졌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가해자가 누렸던 명예나 지위란 결국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인지, 역설적으로 그 명예나 지위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었음을 보여준 것인지에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 지위나 명예는 아무나도 누구나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분명히 해 주었다. 그것은 도덕적 품성에 기초하지 않은 어떠한 예술적 자질이나 정치적 능력도 모두 허구라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도덕과 윤리에 자유로운  세계에 놓인 인간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개개인의 이해와 개성을 무덤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정치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창작주체나 행동 주체인 그들 자신의 도덕성의 실종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익명의 공간이나 감시카메라에 기억된 한 장면이 십년 혹은 이십 년 전의 것이었다고 해서 1,2 년 전의 그것보다 상황이 희미하거나 쉬 지워지는 것이 아닌 것이 남녀의 문제이고 그 상처이다. 공소시효와 유통기한의 유무야말로 법과 윤리의 차이일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로 보는 관점이나 성이 권력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은 오래되었다. 또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조변화에 따라 그 권력이 약화되고 있다 해도, 남과 여 사이에 엄존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는 여전히 그 역사만큼이나 깊고 견고하다. 이제 와서 가해자의 지위와 압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피해자를 탓하거나 그것은 억압이 아니라 합의였다는 가해자의 주장은 모두 사태의 본질이나 접근방식과는 무관하다.

지금의 미투현상을 촛불정국과 연결지어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촛불이야말로 관습과 편견에 대한 개인의 주체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분실한 수표의 주인임을 광고함으로서 그 수표가 무효임을 공표하듯 피해자는 자신에게 가해진 한 순간의 신체적 접촉이 무효였음을 공표하게 된 것이다. 성은 이제 윤리가 아니라 법이 되었으며 법은 성적인 것에서 외과적인 것으로 넘어갔다.   

오늘의 왜곡된 성이나 그 분쟁은 어디까지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아직 에로스의 종말을 선언할 일은 아니다. 이제 미투는 잠재적 가해자인 이 땅의 남정네들 모두의 대속으로 이어져야 할 시간이다. 한 여검사로부터 촉발된 미투라는 이름의 바람이 어떻게 사회운동이자 이데올로기로 전이되는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내일신문 2018.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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