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속도 산문

평화에 따라붙을 수 있는 속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평화를 향유하는 속도, 평화를 지향하는 속도, 평화를 유지하는 속도. 평화 뒤에 따라붙는 화법으로서의 평화의 속도는 적절한 용례가 많지 않다. 평화의 속도란 연애의 속도보다는 덜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다만 그것을 누리는 시간이거나 그것에 다가가는 시간이거나 그 상황을 기다리는 시간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될 터인데, 중요한 것은 이 고귀한 복록이 개개인의 생활 속에 묻어있는 정서적 정황보다는 집단이나 국가 간의 대립과 화해의 문제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사회적이다. 개인의 낙원 혹은 도원경으로서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국가나 집단 간의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할 때의 평화가 더 평화스럽다.

요즘 한반도는 남북대화와 경협의 속도가 문제되고 있다. 이른바 속도 조절론이다. 연애의 속도가 빨라지면 뜻밖의 임신이라도 걱정할 수 있지만 국가 간의 접근의 속도가 빨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대립과 반목에만 익숙해 온 때문일까, 간밤에 내린 함박눈처럼 찾아온 서울과 평양의 손님맞이가 아직은 서툴고 요란하고 호들갑스럽다.

평화체제 구축으로 향하는 한반도의 레이스는 지금 그 반환점에 서 있는 듯하다. 중일러를 비롯한 세계의 이목은 격려와 우려의 시선으로 남북미의 평화레이스를 지켜보고 있다. 남북의 시계는 이미 하나로 맞추어졌고 비무장지대 경비초소 철수도 시작되었다. 지상 해상 공중에서의 남과 북의 모든 상호 적대 행위가 전면 중지되었고 군사분계선 일대와 동서해 완충구역의 사격과 훈련이 중지된다. 동서해선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도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남북의 상황변화에 미국이 놀라워하는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화평을 전제로 한 만남에 미국은 혈맹이지만 북한은 혈육이므로 미국의 처지가 다소 허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미 간 협력과 비핵화를 위한 대북 제재를 조율하기 위한 소위 '워킹그룹'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미국의 고육지책이라 할 만하다. 우리 측은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변호해 주었고 우리가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했지만 대북 제재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 측의 감시 기구라는 의구심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남측의 과속은 평화의 원칙을 어떻게 위반하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영토와 주권을 상호 존중하고, 모든 분쟁은 교섭과 상호 이해에 의한다는 것, 내정 불간섭, 호혜 평등에 입각한 상호 협력이라는 원칙을 따르자는 것은 1954년의 중국과 인도의 평화원칙이었다. 중심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궤도를 지키지 않으면 다른 것과 충돌하게 된다는 공전과 자전의 원리,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원리, 차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없으면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공평과 평등의 원리는 평화학의 전제였다.

과연 지금의 문재인 정부의 평화 주행은 독주인 것인가지금의 속력이 과속인지 고속인지, 중앙선 침범인지 추월인지,  좌회전인지 유턴인지를 분명히 구분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도착지는 분명하지만 갈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평화는 지켜야 할 가치이면서 반드시 함께 누려야 할 복록이다. 승자 없는 평화를 주창하던 백 년 전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3.1일운동의 사상적 배후였다. 70년 전의 백범의 모란봉 연설이나 오늘의 문대통령의 능라도 연설 모두 하나된 민족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우리민족끼리는 낡은 명제이지만 아직 유효하다. 평화가 아니면 싸우지 않는다는 역설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든 평화 지연세력과 싸워야 한다. 내일신문 2018.11.02


강요배, 풍경의 은유 갤러리

강요배에 등장하는 자연과 역사는 대체로 제주로 짐작되는 풍광들로 채워지지만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도 아니고 보이는 그대로도 아닌, 작가의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상의 재현이다. 학고재 전시, 코엑스 아트페어, 여수 아트페스티벌에 출품된 최근의 그의 그림이 그렇다.

그는 4.3의 현지인이자 5.18의 목격자로서 그의 풍경은 대체로 칙칙하고 무겁고 거칠지만, 대상에 대한 외경 혹은 경건함은 한결같다. 그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넓으며 구름들은 화면의 구성에 따라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의 크기로 떠 있다. 과감하게 할애하고 있는 하늘이나 구름의 크기는 그가 자연에 투사하고 있는 외경이나 우주적 연민의 크기일지도 모른다.

(2016)은 산의 허리나 지맥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의 길 혹은 그 구멍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어떤 물상의 구체적 형상이 아니라 작가의 심상의 꿈틀거림에 다름 아니다. 물결인지 바람결인지 냉기인지 온기인지 모를 모호한 형상의 소용돌이가 마음의 소용돌이로 이어진다. 얽힌 바위 사이로 흐르는 풍혈냉천이 개펄에 이르러서는 오랜 풍화로 다져진 바다나 모래톱의 형상으로 바뀌면서 거칠고 단단한 어떤 표면의 이미지로 전화한다. 갈색과 흑색의 껄끄러운 조화가 고졸(古拙)하다. 바람이나 나무, 흙과 바위, 하늘과 땅의 껄끄러운 조화가 만들어낸 이 적막한 고졸미는 아마도 회화의 전범을 이탈하지 않은 그의 고전적 회화기법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그리는 자연은 해석된 풍경, 혹은 자신을 투영한 것들이다. 요즈음의 그는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그것과의 관계를 그린다. 그 형상이나 흐름이나 치솟음, 뒤섞임이나 표면들은 산이나 물비늘, 파도, 개펄을 빙자해서 임의의 혹은 자의적 형태로 자신의 심상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 구름과 산의 구멍은 어스름에 차 있고 빗물은 비애처럼 흐른다. 검은 하늘과 누런 구름은 대지의 질서 혹은 한 생의 장엄한 일몰을 상기시켜 준다. 나무들은 숲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고 고목은 귀기나 음기에 차 있다. 그의 풍경에 가라앉아 있는 시간의 더께 혹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관람자를 유추적 상상 속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북촌의 팽나무나 한림의 까마귀들이 보여준 기억의 고유명사들은 하나의 보통명사로 전이된다. 강요배의 자연에 대한 해석적 근거를 제주의 풍토나 역사와 조응해보는 관점은 이제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은유는 세계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 울림이 상징에 이르면 해석자를 당혹에서 수긍으로 이끌면서 경이에 눈뜨게 한다. 최근의 꽃비초록이 보여준 심미적 효과는 구성의 단순성에서가 아니라 해석의 다의성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고유명사에서 추상명사로 이행해가는 강요배의 최근의 자연과 사물에 대한 방법적 모색을 주목해 볼 일이다. CULTURA, 2018.11






청문회를 보는 눈 산문

대통령의 사회부총리 겸 교육장관의 임명 강행으로 국회가 시끄럽다. 야당은 딸 위장전입, 아들 병역문제와 재산신고 축소, 상습적인 교통 위반, 정치자금 허위보고, 지역사무실 임대료 대납, 남편회사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후보의 도덕성과 자질을 의심하였고 이를 무시한 대통령의 임명 강행을 반의회주의적 폭거라고 비난했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공직후보자의 임명 강행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역대 정부에서 무시로 행사된 이 부적격 판정을 뒤집는 임명강행에는 그때마다 청문회 무용론이 뒤따랐고 이 사태는 되풀이되고 있다. ‘부적격판정적격임용의 반복적인 악순환은 더 이상 발생하지 말아야 할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때이다.

이미 정부는 기존의 병역 기피, 세금 탈루, 불법적 재산증식, 위장전입, 연구 부정행위 관련자를 공직 임용에 배제하는 '5대 원칙'에 음주운전과 성 관련 범죄를 추가해 '7대 비리'로 규정하고, 정부가 제시한 이 7대 비리와 12개 세부항목에 저촉이 되는 인사는 검증 테이블에 아예 올리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문재인정부가 새삼스럽게 그리고 새롭게 다짐한 이 인사검증 기준과 세부 항목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시민적 자각의 기준으로 고위직 인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강령일 터이다. 오랜 세월 파행과 관습으로 무심하게 지나쳐 왔던 각종 비리와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늦었지만 새롭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이 다짐을 신뢰한 것은 이 정부야말로 우리들의 촛불이 쟁취해 낸 새로운 정권이기 때문이다. 민심에 기초하지 않은 어떠한 이념도 민심의 동의 없는 어떤 정책도 민심과 동떨어진 어떠한 가치도 용납하지 않는 국가로 거듭나자는 약속은 오랜 동안 수많은 적폐에 시달려 온 우리 모두의 염원이었다. 이 약속은 시쳇말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국민과의 협약이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이 다짐과 약속이 파기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의 시선은 따가운 것인지 서글픈 것인지가 분간되지 않는다. 청와대에서는 임명강행의 변명으로 소명할 것은 소명이 되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였으며 오해된 부분은 해명하였다고 하였다. 이 또한 오래된 사진처럼 눈에 익은 장면이고 낯익은 구태정치를 빼닮았다. 오랜만에 자리를 바꿔 앉은 탓인가, 신야당의 비판의 목소리는 감정 정치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냈고, 이를 무시한 채 임명장을 수여하는 신여당 임명권자의 모습은 감성 정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동석한 피임용자의 시댁 노인의 모습이 잠간 스쳐가고 이내 그 사연이 공개되었다. 인연은 인간적 결속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정치 자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국회의 동의가 필요치 않은 장관 등에 관한 청문회는 당장 폐지하거나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을 경우 임명은 당장 취소하여야 한다. 세운 원칙은 지켜야하고 못 지킬 원칙은 파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사전 검증시스템이 중요한 과정인 미국의 경우 임용후보자에 대해 백악관 인사국, 미연방수사국, 국세청과 공직자 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증을 철저히 한다. 여기에는 개인 및 가족배경, 직업, 교육배경, 세금납후와 전과뿐 아니라 각종 소소한 범칙금 부과여부까지 조사되는데, 이 사전 검증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직접 임용후보자를 면담하고, 공식지명에 앞서 의회 지도자 등과 사전협의가 이뤄진다. 이른바 정책 토론이 될 것이다. 토론에까지 이르기도 전에 이른바 팩트 체크의 수준에서 소모적 정쟁에 매달리고 마는 지금의 용두사미식 청문회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청문회 없이 입법되거나 보직 임명되는 사례는 없다고 할 만큼 정착된 미국의 청문회는 본받을 만하다.

일자리 창출과 집값 잡기에 허둥대고 있는 현 정부의 평판도는 많이 떨어졌지만 남북 북미 문제를 풀어가고 조정하는 외교적 성과는 눈부시다. 수구 세력의 비판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적폐 척결 작업도 순조로운 편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의 뇌관은 인사문제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시간이다. 논공이나 감성 인사가 촛불 정부의 암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사는 검증이다.   내일신문, 2018,10.5


종전 없는 평화 산문

최근 북미 회담 일정이 지연, 취소, 재개를 반복하고 있다. 협상을 위해 방북을 서두르던 미측 국무장관의 방북취소가 발표되자 남측은 당황하고 중국 측은 머쓱해지고 당사국인 북은 침묵에 들어갔다. 이른바 '빈 손'과 '역습' 공포 때문이다. 여기에 납북회담 준비를 내세워 남측은 급히 북에 특사를 보내 중재에 나설 계획을 세우는 둥 발길이 바빠졌다. 판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데 대한 공통의 상황인식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북미회담의 문제는 상호 불신에 있다. 북측의 선 종전선언과 미측의 선 비핵화가 맞서 있는 이 대립은 우리에게 정치와 전쟁의 생리와 그 상호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준다. 이미 남북 북미 회담에서 종전과 비핵화를 다짐한 마당에 그 조건의 선후가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인가에 대해 되묻게 된다. 싸움을 끝내자는 선언이 먼저인가 손에든 칼을 버리는 행위가 먼저인가는 누가 봐도 전자가 맞다고 할 것이지만, 약속은 당장 할 수 있지만 무기 또한 도로 주워들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양측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흉기를 멀리, 되찾기 어려운 곳으로 버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전쟁은 그 내용만큼이나 복잡한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행위의 일시적 또는 잠정적 중단이 휴전이라면 정전은 적대행위의 중단이고 종전선언은 교전당사국들이 전쟁을 종료시켜 적대관계를 해소시키고자 공동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것, 강화협정이나 휴전협정과 구분하여 종전선언이라고 표현한다. 종전선언은 전쟁을 종료한다는 점에서 전쟁 상태인 정전휴전과는 차이가 있으며, 전쟁의 원인을 해소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화협정이나 평화협정과는 다르다.

선언과 실천, 말이 먼저인가 행위가 먼저인가에 대한 이 단순한 의문 속에는 그러나 양측의 잊을 수 없는 과거와 불안한 미래가 숨어 있다. 미측은 북측의 그동안의 수많은 협약 위반사례로 인한 불신에 쌓여있고 북측 또한 자신들의 무장해제에 따른 미측의 무단 공격에 대한 불안이 있을 것이다. 싸움을 끝내자는 선언이 없었으므로 예측 불가능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무기를 먼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측 또한 선언이 쉽지 않은 것은 그 선언에 부수되는 후속조치 때문일 것이다. 전쟁 끝났으니 그동안 함께 했던 동맹군과 그 기지의 존재를 부정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신뢰 문제에서 엇갈린다. 마치 닭이냐 계란이냐의 싸움으로 번져 있는 이 소모적인 분쟁은 그 논거의 합리성 못지않게 양측이 깊은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전쟁발발 68, 분단 73년의 한국 현대사는 전쟁의 폐허를 경제와 민주의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한 자긍심 못지않게 지척에 둔 부모형제조차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인식하는 데 민족자결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려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3.1운동 당시의 사상적 배후로도 지목되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평화론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민족문제는 그들에게 맡기자는 소박한 이론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파장은 컸다파리강화회의에서의 윌슨의 민족자결론은 강대국들에 의해 왜곡되는 사례를 남기기도 했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지금 북미는 각각 회담의 승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태도의 문제이지 결과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평화협상에 승패는 없다. 남북미중이 각각 승자로 남기만을 바란다면 지금의 휴전상태에서의 갈등과 대립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란 휴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만을 낳을 뿐이다.

이제 평화협상가 윌슨의 금언 - 승리가 없는 평화이어야 한다. 균등한 힘의 상황에서만 평화는 계속된다-는 명제에 남북미중은 동의해야 할 때이다. 요즘의 북미간의 종전은 존재하지 않는 약속이요 휴전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종전 없는 평화가 가능한지, 북미와 남북은 이 우매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일신문, 2018.9.3

 

 


멘토의 시간 산문

6.13 지방 선거에 참패한 야당이 원인규명과 위기탈출 방안에 고심하고 있다. 리모델링인지 재건축인지 모를 사태로 이어지는 각 당의 요즘의 풍경은 하도 자주 반복되는 것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심사는 이제 씁쓸하지도 우습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때마다 정치란 무엇인가 새삼 되묻게 되고 나와 우리가 사회와 역사 속으로 어떻게 편입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타고온 버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지금 가고 있는 속도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다시 자문하게 된다.

야당의 참패에는 저마다 이유도 많고 치유방법도 백가쟁명이다. 한 야당은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무능 부패 정권의 몰락을 자신들과 분리해서 선거에 임하는 우를 범했다. 무엇보다도 일부 당직자가 보여준 일련의 정치적 행보나 발언들은 시대착오적이었고 군부독재 시절의 정치 사회적 관습에 자신을 가둬버린 현실인식 방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 일부의  정치적 발언은 자신들의 품격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념과 신념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보수와 수구, 친북과 종북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당적을 같이 했던 또 다른 두 야당은 자신들이 왜 갈라서야 했는지에 대한 명분도 철학도 제시하지 못한 채 적폐와의 연대와 단일화를 얘기했다. 촛불 정국을 이루어낸 정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던 그들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국정농단과 비리정권의 누더기를 걸쳐 입은 이 거대야당은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 진보도 보수도 혁신도 아닌 또 다른 야당 역시 응급실에 누워 수혈을 기다리고 있다. 다급해진 그들은 여기저기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아예 자신들을 도와즐 책사들을 호명하고 있다. 청년 실업을 걱정하고 업무를 기획해야할 그들 자신에게 때 아닌 일자리가 창출된 셈이다. 세간의 책사로 분류되는 몇몇 인사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구원투수로 입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고 자신들의 정권을 탄핵했던 인사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심지어는 정치와는 무관한 유명 의사를 비대위원장으로 거론하는가 하면 아예 자신의 당과는 수혈 불가능한 혈액형의 학자를 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자고도 했다. 전문적인 의술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 학자의 지식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이 구애는 지금의 그들의 절박함이 어떠한 지경인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기술이나 지식이 언제나 지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지혜야말로 경험의 축적물이요 그것은 지식과 식견의 차이만큼 중요한 덕목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타게 찾고 기다리는 멘토의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쓴 사도의 계시록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예언가의 점괘라도 받아 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전장의 장수처럼 자신을 도와줄 책략가를 다시 삼고초려 하겠다는 것인가.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폭력과 전쟁의 황폐를 시대 배경으로 플롯도 스토리도 무대장치도 없이 황량한 한 그루 나무그늘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들은 다만 고도씨를 기다리는 것으로 아득하게 앉아있다. 그들의 하는 일이란 고도가 올 것을 믿는 일과 무연한 수다로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고도는 다만 그들의 기다림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선지자인지 구원자인지 극중의 기다림의 대상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상황의 완고성과 지속성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처한 희망과 절망의 역설적 병행원리이다..

멘토는 오지 않는다. 그는 전쟁터에 나간 친구의 아들을 아비처럼 스승처럼 보살펴주고 사라진 신화 속의 이름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진정한 멘토는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의 손님, 새로운 어떤 신념이나 가치이어야 할 것이다. 내일신문, 201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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