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념과 현실 산문

지난 연말 문득 한 권의 책이 배송되었다. 벽초 홍명희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것이었다. 아 이 사람 아직도 갖바치와 함께 구월산을 누비고 있구나싶었고, 오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는 외우 채진홍 교수가 일찍이 임꺽정으로 학위를 할 때부터 야심을 드러낸 터여서 그리 놀라운 분량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한 산도적을 추적하는 저자의 관심은 일관되고 열정은 넘쳐났다. 임꺽정은 앞 시대의 홍길동이나 뒷시대의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대도로 꼽힌다.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서에는 정작 한두 줄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있었던 일들의 역사와 있을 법한 일들의 문학이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유로운 상상력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의 홍명희의 소설에 발견되는 이념이나 기법을 작품 내적 원리의 규명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생애와 관련지어 그의 소설과 사상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었고 그 의미는 강렬했다.

남북 정상이 올해 들어 세 번 만났다. 그것도 아메리카합중국 정치꾼들이 늘 머리 아파하는 판문점과 평양에서.”로 시작되는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미 논거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었다. 저자는 해방이후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때 홍명희만큼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간절히 원하고 주장했던 대표적 인사는 없었다고 꼽았다. 그는 일제가 패망한 8.15를 우리민족의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미소의 점령사건이라는 홍명희의 관점에 주목했다. 미소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국제적 형세임을 홍명희는 간파했다는 것, 그리하여 해방의 감격을 또 다른 비극의 씨앗으로, 6.25를 그 정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미소가 지금은 미중으로 바뀌어졌을 뿐이라는 첨언도 곁들였다.

정치적 이념과 문학적 신념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홍명희만큼 개인사와 시대사가 일치하는 경우도 드물다. 이는 부친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자결한 가족사에서보다도 임꺽정에 촘촘히 배어나는 민족 정서와 민중적 삶, 반봉건 민족자결의 상징구조들에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홍명희의 독립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3.1운동에 열결되고 민족통합운동은 신간회로 나타나며 좌우대립을 지양하고 미소의 영향을 벗어난 남북통일정부수립에의 열망으로 이어진다.

벽초는 육당 춘원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문사로 거명되던 인물이었다. 춘원과 육당의 친일, 훼절은 급진개화와 무비판적 서구수용의 결과물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홍명희의 합리적 외세대응은 의문의 북한 체류로 이어진다. 김구와 조만식과 홍명희는 신탁과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각각 출생지인 북과 남의 반대편에서 암살 총살 혹은 의문의 말년을 보낸다.

식민지배하에서 과거를 되새김하는 일은 아픈 현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여기가 아닌 그때/거기,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시대로의 도피는 그대로 당대 현실에 대한 소망적 사고의 표현이었지만, 소설이 현실과의 대응에서 오는 당대적 양식이라는 점에서 과거로의 후퇴는 작가의식의 부재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이야기가 흥행하는 오늘이란 당면한 현실이 얼마나 조야한 것인가를 반증한다. 조선 중기의 산도적의 얘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홍명희의 현실과 불과 한 세기 전의 김구와 조만식과 홍명희를 되새김하는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유사한가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미를 둘러싼 시대상황과의 조응에서 닮아야 할 것과 닮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어제에 관한 얘기는 내일을 위한 것이어야한다. 오늘은 늘 어제의 산물이었음을 지각하는 능력과 자질이야말로 내일을 예비하는 지혜일 것이다. 연말정산서처럼 문득 배송된 한 권의 문학론에서 새삼 한국 근현대의 혼돈과 갈등을 다시 만나게 되는 새해, 선인들의 이념적 거취와 정치적 좌절에서 절망 아닌 희망을 보는 새아침이다. 내일신문, 2019.1.7


피오나 래, 상상의 나래 갤러리

피오나 래 Fiona Rae의 전시(2018.11.23.-2019.01.20)는 미술 혹은 예술 일반에 대한 그동안의 우리의 생각들에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전통의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새로 문을 연 학고재청담의 개관 기념전이었다. 초대된 피오나 래는 홍콩태생의 영국의 여류작가로 80년대 영국화단의 전위적인 젊은 작가군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시실은 사면을 밝히는 화사한 색조와 날렵한 선묘들이 관람객을 맞았는데, 캔버스에 피어오르는 가볍고 밝고 맑고 날렵한 붓질이 부드럽거나 경쾌했다. 수채화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모두 oil on canvas 이거나 간혹 oil and acrylic이 섞여 있었다. 유화물감의 완강한 무게와 짓이겨 바른 무거운 질감과 배색들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 그것은 다소 낯선 것이었다. 빗자루가 지나간 것 같은 붓의 흔적이 끝나가는 곳에 다른 조형요소가 이어지고 그리고 그것들이 춤추듯 휘어지는 사이사이에 땡땡이 점들이 이어지면서 무언가를 그려 보이고 있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이 그림들에 대하여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백설공주는 자신의 세계에서 달을 꺼내 올린다」「공중으로 녹아들다와 같은 서사적 제목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인어, 혹은 그 어떤 인물의 형상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보다 더 어려웠다.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의 잔해, 흔적을 지워가면서 새로 시작하는 듯한 붓놀림, 색의 토운을 줄여나가다가 갑자기 이를 전면 배제한 파스텔 톤의 안개 같은 추상이나 물성으로의 변화가 반복된다. 과거 회화의 조형적 클리쉐와 위압적 주제와 길들여진 심미적 장치들을 무시한 채 작가는 발랄함과 부드러움과 소프트웨어적 흐름으로 회화적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피오나 래의 지워지는 선은 비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그가 소재로 다룬 왕관이나 구름, , 드레스, 모자, 별들은 모두 왕년에는 그림의 소재로서 매우 의심스럽고 소소한 것들이었다. 형상과 배경이 부드럽게 자리바꿈하거나 색조들이 얽히는 형국이야말로 형태없이 공존하는 디지털 스크린과 닮아있다. 해설자는 이를 가리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작가의 새로움(길다 윌리엄스)이라 하였다.

피오나 래의 이번 전시는 오늘의 예술에 대한 인식에의 확장과 전환을 시사해 주는 메시지이다. 전통과 현재, 상상과 환타지, 의미와 무의미, 은유와 실재, 숭고미와 유희성 - 이 모든 미적 담론들에 대한 전복과 해체와 자유에의 퍼포먼스였다. CULTURA, 2019.01

* 그림: Fiona Rae, Snow White lifts the moon out of her sphere, 2017, Oil on canvas, 183x129.5cm


도라산의 철길

1130일 도라산역에서 남북간의 철도 현대화를 위한 남측의 공동 조사단 일행의 출정식이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28여명의 조사단과 관련 부처 인사들이 함께 모인 자리. 북녘을 향하고 있는 기차 앞에서 출정의 소회와 각오를 담은 담화들이 이어졌는데, 쌀쌀한 날씨에 그들의 입김이 기차의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조사단은 서쪽에서는 신의주, 동쪽으로는 금강산을 거쳐 두만강까지 약 1200km를 이동하며 현지조사를 벌인다. 18일 예정의 이 장정은 숙식을 열차 안에서 해결하면서 철도 운영체계와 전력 통신 노선 현대화를 위한 종합적인 점검과 진단이 이루어진다. 공사 착공식은 연내에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TV에 비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한반도 물류 혈맥이 뚫리고 북한을 경유하여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러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이어지는 철의 실크로드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뉴스는 덧붙여 말했다. 실제 철도 연결 작업이 진행되려면 공사를 위한 물자를 투입해야하는데 이는 대북 제재 위반사항이라는 것, 북한 비핵화조치를 유인하기 위한 미국과의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아직 철도사업의 대북 제재 예외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조사는 시작하되 공사 진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TV에 비친 씁쓸한 장면이었다.

선비핵화와 선제재완화가 충돌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교착상태인 가운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G20에 참석중인 한미정상의 단독회담에서 김정은위원장의 서울답방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공동 노력에 추가적인 모멘텀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노라는 발표가 나왔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당 위원장의 남한 답방에 긍정 의사를 나타냄에 따라 우리 측의 답방 추진에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반갑고 씁쓸한 모순된 감정은 남북미의 관계변화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내내 계속되었다. 남북미의 대화와 회담이 연기, 취소, 재개를 반복하곤 했던 그동안의 일정은 과연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의 당사자인가 중재자인가 국외자인가 하는 자문의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이 절망과 환호와 회의의 시간들은 그대로 식민지배와 광복과 분단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호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베르린 선언 이후의 한국의 역할과 위치는 가파르게 바뀌는 모양새다. 문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꺼이 운전자 노릇을 자임한 것은 북미 관계가 선제 타격론으로 극단을 달릴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북미회담을 이끌어내자 세계의 언론은 그것을 놀라운 외교 쿠데타로 평가했고, 지난 9월에는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을 향해 수석협상가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 북에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의 역할이 잠깐 빈번해지자 한미의 보수나 야당 일각에서 문대통령에 대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비아냥도 생겨났다. 이 비아냥은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곧장 미군 철수론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불만의 표시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미국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은 동맹국의 결속을 과시한 것인지 협상 주체를 강조한 것이지가 분명치 않았다.

휴전협정은 미국 유엔과 북한 중국 사이에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체결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핵 감찰국이자 보유국, 그리고 한국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국가로서의 신흥 핵보유국 북한에 대한 미국의 지위는 당사자일 수밖에 없지만, 북이 핵 국가일 때의 안보 외교의 피해자는 미국보다도 남측이요, 북한 비핵화의 수혜자 또한 미국보다는 한국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당사자가 된다. 최근의 남북의 대화와 경협의 속도에 보이는 미국의 태도는 당사자의 과민이다. 그것이 과속인지 고속인지, 역주행인지 유턴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또다른 이해 당사자인 우리의 운행수칙에 의한 것이었다.

도보다리의 마임극, 능라도의 함성, 생수병에 퍼 담았던 백두산 천지 물은 2018년이 기억해야할 역사였다. 그것들은 우리를 감상에 젖게 했지만, 감성에 기초하지 않은 어떠한 정치적 결단도 허구임을 증거해 줄 것이다, 12월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예비해 준다. 도라산을 떠나 북녘으로 향하는 12월의 철길은 남북미가 동승한 평화의 길이어야 한다. 내일신문, 2018.12.03


김용익의 소설, 밤배 고동소리로 오는 감동 산문

김용익의 소설은 그가 도달한 문학적 성취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국 현대문학사는 그를 소홀했거나 지나쳤다. 그의 소설이 먼 이국에서 영어로 먼저 발표되었다는 점도 그 이유의 하나가 되겠지만,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김달수나 이회성, 러시아의 아나톨리 김과 같은 재외 한인작가들과도 다른 상황이었고, 언어문제에 국한해서 볼 때 그는 미국의 강용흘, 김은국이나 독일의 이미륵과 가깝다. 그는 미국 이민 2세도 아니었고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간 유학생이자 영문학자였다. 그는 번역/개작 과정을 거쳐 같은 작품을 두 번 발표한 셈인데, 이 때문에 발생한 그의 문학적 범주가 영문학이냐 한국문학이냐에 대한 논의는 언어귀속주의에 얽매인 문학사의 다소 원론적인 쟁점에 불과할 것이다.

1920년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 아오야마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8년 도미, 플로리다와 켄터키에 유학 중 고국의 전쟁 소식을 접한다. 1958년 귀국한 그가 겪은 전쟁체험이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50년대 후반의 어지러운 한국사회의 모습에서였고, 이후 고려대에서 강의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베트남 전쟁이 아직 진행 중이던 197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의 그의 데뷔작품 The Wedding Shoes(Harper’s Bazzar, 1956)가 한국에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7년 후(꽃신,현대문학,1963)였다. 김용익의 이러한 이력은 그의 소설적 공간이나 주제를 설명, 변호해 주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이즈음 주로 미국에서 주목받았고 각국에 소개되었다. The Happy Days, The Diving Gourd, The Blue In The Seed, The Sea Girl은 미국 외에 영국 서독 덴마크 뉴질랜드, 인도,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최우수도서 청소년도서 등으로 교과서에 소개되었고, The Wedding ShoesTV드라마 영화, 발레 등으로 여러 나라에 소개되었고, From Bellow The BridgeThe Village Wine은 발표 당년의 외국인이 쓴 미국 최우수 단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김용익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상당부분 한국전쟁과 연루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의 시적 영감을 주던 통영을 자신의 작가적 영토라 하였다. 그의 소설은 전란의 한국 사회나 도시, 향토색 짙은 농어촌을 시공간으로 하고 있다. 데뷔작 꽃신은 이러한 작가의 문학적 성향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작중화자 ”(상도)는 어느 날 피난지 장터에서 낯익은 신장수 노인을 발견한다. 그의 딸은 늘 아비가 만들어준 꽃신을 신고 다녔는데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는 듯 혹은 공중에 떠 춤을 추는 듯 하던그 꽃신의 환영을 는 잊지 못한다. “는 신집 딸을 좋아하지만 백정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청혼이 거절되고, 다만 손님이 끊겨 망해가는 신집에 쇠가죽을 그나마 외상으로 대주며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꽃신 한 켤레면 고무신 백 켤레와도 안 바꾼다는 노인의 고집을 세상 사람들은 비웃지만 그 꽃신의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는 더욱 슬프다. 꽃신은 작중의 가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욕망과 그리움의 구체적 상징물이다. 꽃신만을 고집하는 노인의 대한 집착은 자신의 심미적 가치가 이미 속물적 세계의 힘에 의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퇴물인 꽃신을 가지고 하늘값을 부르는노인은 결국 죽고, “는 신집 딸을 위해 신발값을 지불하지만, “결혼신발이 아닌 슬픔을 사고 만 것이다. 노인이 지키고자 한 것은 사라져가는 것, 밀려나는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었고, 은유적 사물로서의 꽃신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지고지순한 어떤 가치나 이념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변천은 김용익의 단편 가운데 가장 현실감 넘치는 작품으로 한 다리밑 움막 집 아이의 성장기이다. 장터에서 구두닦이를 하거나 코 큰 병정에게 양색시를 데려다 주는 일을 하는 아이는 하는 일 없이 갓 쓰기만을 고집하는 아버지, 미제 물건을 빼내 시장에 내다 파는 어머니, 그리고 늙고 병든 개 누렁이와 다리 밑 움막에서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아이는 어두운 골목 미군부대 클럽이 있는 데서 깽깽 우는 누렁이 때문에 문득 어둠 속에서 서 있는 목도리를 푹 눌러쓴 낯익은 여자를 발견한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아이는 앞으로 뛰었다. 죽어가는 누렁이를 지나가는 달구지에 맡기고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이 있는 북쪽을 향해 걷는다. 논두렁의 개구리을음보다 더 큰 소리로 울면서 걸으며 아이는 이 밤에 일어난” “그 개가 보여준 일들을 커서도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고 느낀다. 그것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만나게 되는 슬픔이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오그리고 주저앉는어머니, “벼슬 없는 수탉처럼 갓이 벗겨져 버린 아버지의 상투머리는 전후의 피폐해진 삶의 정황으로 비유된다. 누렁이의 죽음은 이 다리 밑 아이의 소년기가 이미 끝나가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며 아이의 통곡이야말로 자신이 마침내 화해할 수 없는 세계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입사식이었다.

동네술은 전황이 국군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인민군 편으로 기울어 있는지가 분간 안 되던 때의 동네 사람들의 희극적 정황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결구에서의 반전은 소설적 기법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다. 동네 사람들의 성향을 탐지하던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곤 했던 당시의 유치한 게임에 읍장이 걸려든 것이다. 인민군과 국군을 뒤바꿔 말해버린 실수로 읍장이 마지막으로 원했던 막걸리 한 잔은 우스꽝스러운 세계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작가는 또한 이러한 비극적 정황을 막걸리 한 잔의 무게에 대비시킴으로써 세계를 야유하고 있으며 사태의 심각성마저 무화시키고 있다

커스타운에서 온 병정은 인정 많고 허풍 좋은 한 미군 병사의 맹아원 아이들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담고 있다. 그가 들려준 지상 최대의 서커스타운인 고향의 클라운(clown;어릿광대, 익살꾼)’ 얘기는 사실은 자신의 얘기가 되고 말았다. 서커스타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아이들은 그를 크라운(crown)아저씨라 불렀고 자신은 그때마다 클라운(clown)’으로 발음을 고쳐주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 구사된 언어적 아이러니는 재미있고 진지하다. 한 이국 병사가 전란의 맹아학교에 남기고 간 인간적 허풍에 작중 화자는 왕관을 씌워준 것이다.

종자돈본능에의 신비가 짙은 토속성과 어우러져 김용익 단편의 완성도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바우의 호기심은 같은 또래의 송화와 무서운 꿈울 꾸고 난 것 같은한바탕 소동을 체험하면서 구체화 된다. 바우와 송화의 젖은 알몸을 묘사하는 데로 모아진 결구는 멸막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마리 짐승의 교합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하거나 아름다운 어떤 것도 아닌, 다만 그들의 공포와 신비의 공간이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마 생애 처음으로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 결정적인 행위인 발가벗기에서 바우와 송화는 새끼처럼꼬아진 서로의 존재가 교통하는 상태를 체험한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이 의식에서 아이들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마리 짐승의 의식을 예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느낀 막연한 죄의식은 자신들이 이미 금기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의식한 행위이다. 금기가 죄라고 느끼는 것은 거기에 진입하기 이전의 상태에서는 일종의 신성일 수밖에 없다. 바우와 송화는 이 신성 앞에서 불안한 전율을 체험한 것이다.

밤배가 보여준 화해는 감동적이다. 아버지는 이제 뭐든지 네가 좋다는 대로 하자고 말하고 작중 화자는 어머니처럼변해버린 아버지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아들의 붓글씨를 붙여놓은 채 밤배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버지는 이미 한 평생 쌀 한줌 벌어보지 못한 손재주라고 소리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의 슬픔은 세월의 변화에도 마모되지 않은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에게 가했던 강제성을 순종으로 변하게 만들어버린 시간의 거대한 힘 때문이었다.

꽃신 변천, 동네술 겨울의 사랑, 커스타운에서 온 병정, 번역사 사장 등 일련의 작품들은 소위 전후소설이라는 이름의 기왕의 다른 작가들의 성향과는 또다른 면에서 전후의 한국사회를 잘 묘사해 보이고 있다. 이동해 가는 사회 안에서의 인간과 사물에 관한 정서나 의식의 변화는 그의 소설에서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전쟁 속의 인간보다는 전쟁 속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임으로써 전쟁이라는 특수 체험이 어떻게 삶의 본질과 형상에 간섭하는가를 잘 보여준 단편미학의 고전이었다.

김용익의 소설은 향토성과 세계성이 만나는 문학사의 보기 드문 사례이다. 아련한 그리움의 정서와 현실과의 대결에서 마침내 맛보게 되는 그득한 상실감 - 그 한국적 향수와 페이소스는 사라져 가는 꽃신의 환영처럼 애처롭고 밤배고동소리처럼 크게 울린다.

김용익소설집1 <꽃신>, 김용익소설집2 <푸른 씨앗> 해설, 남해의봄날,2018




평화의 속도 산문

평화에 따라붙을 수 있는 속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평화를 향유하는 속도, 평화를 지향하는 속도, 평화를 유지하는 속도. 평화 뒤에 따라붙는 화법으로서의 평화의 속도는 적절한 용례가 많지 않다. 평화의 속도란 연애의 속도보다는 덜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다만 그것을 누리는 시간이거나 그것에 다가가는 시간이거나 그 상황을 기다리는 시간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될 터인데, 중요한 것은 이 고귀한 복록이 개개인의 생활 속에 묻어있는 정서적 정황보다는 집단이나 국가 간의 대립과 화해의 문제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사회적이다. 개인의 낙원 혹은 도원경으로서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국가나 집단 간의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할 때의 평화가 더 평화스럽다.

요즘 한반도는 남북대화와 경협의 속도가 문제되고 있다. 이른바 속도 조절론이다. 연애의 속도가 빨라지면 뜻밖의 임신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국가 간의 접근의 속도가 빨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대립과 반목에만 익숙해 온 때문일까, 간밤에 내린 함박눈처럼 찾아온 서울과 평양의 손님맞이가 아직은 서툴고 요란하고 호들갑스럽다.

평화체제 구축으로 향하는 한반도의 레이스는 지금 그 반환점에 서 있는 듯하다. 중일러를 비롯한 세계의 이목은 격려와 우려의 시선으로 남북미의 평화레이스를 지켜보고 있다. 남북의 시계는 이미 하나로 맞추어졌고 비무장지대 경비초소 철수도 시작되었다. 지상 해상 공중에서의 남과 북의 모든 상호 적대 행위가 전면 중지되었고 군사분계선 일대와 동서해 완충구역의 사격과 훈련이 중지된다. 동서해선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도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남북의 상황변화에 미국이 놀라워하는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화평을 전제로 한 만남에 미국은 혈맹이지만 북한은 혈육이므로 미국의 처지가 다소 허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미 간 협력과 비핵화를 위한 대북 제재를 조율하기 위한 소위 '워킹그룹'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미국의 고육지책이라 할 만하다. 우리 측은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변호해 주었고 우리가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했지만 대북 제재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 측의 감시 기구라는 의구심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남측의 속도는 평화의 원칙을 어떻게 위반하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영토와 주권을 상호 존중하고, 모든 분쟁은 교섭과 상호 이해에 의한다는 것, 내정 불간섭, 호혜 평등에 입각한 상호 협력이라는 원칙을 따르자는 것은 1954년의 중국과 인도의 평화원칙이었다. 중심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궤도를 지키지 않으면 다른 것과 충돌하게 된다는 공전과 자전의 원리,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는 원리, 차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없으면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공평과 평등의 원리는 또한 평화이론의 전제였다.

과연 지금의 문재인 정부의 평화 주행은 독주인 것인가지금의 속력이 과속인지 고속인지, 중앙선 침범인지 추월인지,  역주행인지 유턴인지를 분명히 구분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도착지는 분명하지만 갈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평화는 지켜야 할 가치이면서 반드시 함께 누려야 할 복록이다. 승자 없는 평화를 주창하던 백 년 전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3.1일운동의 사상적 배후였다. 70년 전의 백범의 모란봉 연설이나 오늘의 문대통령의 능라도 연설 모두 하나된 민족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우리민족끼리는 낡은 명제이지만 아직 유효하다. 평화가 아니면 싸우지 않는다는 역설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든 평화 지연세력과 싸워야 한다. 내일신문 201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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