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그늘 산문

법무 장관 자리를 놓고 된다 안 된다 극단의 찬반 논리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과 인식의 정도를 짐작케 해 주는 놀라운 상황이다. TV를 켰다 끄기를 반복해 보지만 청문회와 관련되지 않은 다른 프로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언제부터?” 혹은 장관이 뭐길래?”하고 자문하게 된다.

사회 속의 인간의 성정을 규정할 때 흔히 이성이나 종교, 놀이나 생산의 측면을 지목하기도 하지만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속성이 두드러진 때가 언제였나 싶기도 하다. 새삼 오늘의 우리의 당파성과 분쟁이 역사의 부산물인가 타고난 것인가 우문도 던져보게 되는 요즘이다. 청문회 일정이나 방식 하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서, 민주화의 선진국이자 정치 후진국의 이 모순된 양면이 신기할 정도이다.

인사청문회는 그 취지와 방법에서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민주적 검증제도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청문회가 탐문수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청문회는 사전에 철저한 정밀검증을 거친 후보에게만 기회를 주어야 비로소 효율적인 검증이 가능할 것이다. 후보의 자질이나 정책검열이 시작되기도 전에 본인의 과거 혹은 현재의 주변에 대한 법적 도덕적 의혹에 매달리고 있는 현행 청문회는 개선되어야 한다. 가족이나 주변의 신상 털기에 의한 인권침해의 부작용은 더욱 문제다.

그 첨예하고도 민감한 사례가 이번 법무 장관 후보 지명에서 예외없이 나타났다. 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보 주변에 대한 압수수색이 집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불과 한 달 보름 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취임한 바 있는 신임 검찰 총장의 의지가 반영된 이 압수 수색은 그 대상자가 같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복심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소 낯설고 생경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검찰의 직속 상급 부서인 법무장관과의 논의나 보고가 생략된 신임 검찰총장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수사권 독립(?)이 눈부시기까지 하다. 그의 취임을 반대했던 야당은 미소로 돌아섰고 그의 취임을 강행했던 여당은 그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함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신임 장관 후보가 그 개혁 대상인 검찰로부터 수색을 당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의혹을 제기하고 답하고 다시 묻고 해명하는 청문회의 과정은 법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적 관심이나 정치권이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청문회의 판정은 끝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질문과 답변이 반복되고 의혹이 해소되고 안 되고의 기준은 여론이나 임명권자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고 그것이 법정과는 다른 지금까지의 청문회의 풍경일 것이다.

법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는 소위 진보 기득권자로 분류된다. 청와대의 수석을 하다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 법학자는 그 보직의 이동 경로에서부터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딸의 논문이나 대학 입학 과정, 가족의 펀드 투자과정 등에서 여러 의혹을 사고 있다. 그럼에도 청문회에서 제기될 의혹이나 해명을 건너뛰어 수사로 직행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의혹이나 피의 사실만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우리의 삶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다만 전자의 사람이 보통명사라면 후자의 사람은 고유명사라는 점에서 다르다. 전자가 물질이나 제도보다는 인간다운 삶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라면 후자는 특정 개인이나 사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소신의 일단일 것이다.

후보자의 임명에 부정적인 여론이 부담이지만 오늘로 예정된 청문회에서 후보자는 자신에 연루된 여러 의혹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품고 있는 의구심 - ‘기득권자에 의한 개혁은 얼마나 가능한 것인가‘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을 입증해 보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우리는 검찰 수장의 '충성'은 기실 자신이 속한 조직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거 해 줄 것을 믿는다. 이념을 같이하는 이념집단은 몰라도 이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이해집단은 용서할 수 없다. 관습과 싸우는 개혁과 부패와 싸우는 정의, 이 양자의 상호성에 대한 인식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내일신문, 2019. 9. 6


어떤 일본인 산문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국 경제 위기론이 퍼지고 일본의 지방 도시들이 한국인 관광객의 감소와 예약취소로 고통을 호소하는 뉴스 사이사이에 문득 떠오르는 한 일본인의 얼굴이 있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나에게 친절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이면서 한국을 고향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오랜 동안 한국에 오기를 꺼려했던 그의 사연 때문이다.

나의 일본체험이란 대학에서 처음 접했던 저들의 소설들을 통한 정도였다. 가령 다자이 오사무나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나의 그동안의 선입견을 수정해 주었고, 생에 대한 아득한 비감과 절망, 삶의 이념이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그들의 경도는 당시 내 또래 청년에게는 신선한 감흥이었다. ‘전범국일본 소설이 보여준 전후의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현실 속의 일본인은 Y대학의 T교수를 비롯한 몇 명 정도. 재직하던 대학과 상호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Y대학에 교류교수로 한 한기를 머물렀던 때였다. "연구 파트너"를 맡아준 T교수는 말없이 친절했고 자상했다. 그는 모리 오가이와 염상섭을 비교해 보겠다는 나의 연구과제는 뒷전으로 하고 일본어를 못하는 나에게 조선족 유학생과 서울의 일본문학 유학생을 통역사로 붙여 주었다. T교수와의 모든 대화는 물론 식사나 회합에 두 유학생 중 한 명은 반드시 통역으로 합석했다. 건장한 체구의 그는 술을 좋아했고 한량 끼 넘쳤으며 자신의 명함에는 작은 서체로 시인 누구누구로만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일본문학 연구자로서의 저서가 많은 듯했다.

나에게 한국의 근대소설사 한 시간짜리 특강을 의뢰하고 강연료를 듬뿍 주었던 어느 날, 모처럼 내가 사는 술에 거나해 진 그가 2차로 카라오케를 안내했다. 그는 볼륨을 높여 옆방의 소란을 진압하고 한국가요를 불렀다. "대전발 0시 오십분~"이었다. 그는 자신을 엔카는 물론 한국노래 열성 팬이라 소개했다.

T교수와 두 유학생과 함께 한 나의 일본에서의 시간은 그런대로 매우 즐거웠다. 학기가 끝나가고 귀국이 가까와 지자 나는 그곳 숙소와 연구실 살림을 챙겨주었던 외사과 담당 직원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회식이  끝나고 옆자리의 통역 학생이 먼저 자리를 뜨게 되자 그와 나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아타미 휴양지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의 유수 문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원하시면 사모님과 함께 며칠 묵을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의 대접에 대한 답례인 셈이었다. 고마운 제안에  나는 흔쾌히 가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와 나의 대화에 가벼운 냉기가 흘렀다. 마침 그날은 아쿠타가와 상인가 하는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날이었고, 노벨상에까지 화제가 옮겨지자 일본에 수상자가 많은데 그 상들이 사실은 개인보다는 국가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까지도 잘 넘어가다가,  문득 일본의 식민지배가 화제가 되었다. 몇 마디 얘기가 오가고, 그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한국인은 결코 잊지 못하고 있노라고 나는 덧붙였다. 조금 예민한 장면이었다. 회식은 정중히 끝났지만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사흘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서의 소식은 없었다. 아타미 휴양지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자 곧바로 답이 왔다. - 지난번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남은 일본 체류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단 두 문장이었다.

T교수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에게서 학위를 받았던 이쪽의 일본문학교수 한 분도 그를 마중하기 위해 김포 공항으로 나갔다. 공항에 내린 T교수가 감회에 젖어 한마디 했다. 통역하던 일문과 교수가 고향(?)에 오니 설렌다 하시네요.” 하며 의아해 했다. 나는 그 교수에게 그날 밤 다까다노바바의 노래방을 나와 T교수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자신은 임란때 가고시마로 끌려간 백제도공 남원 박아무개의 후손이라고 한 말“두려움 때문에" 아직 한국에는 가보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다까다노바바 주점에서의 T교수의 쓸쓸한 웃음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끌려간 사람이 끌어간 사람의 죄업까지 등에 진 것인가. 도공으로 끌려가고 징용으로 끌려가고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에게 덧 씌워진 원한과 분노와 치욕의 원천은 무엇일까, 리의 근현대사가 곧바로 한일관계사로 겹쳐지는 지금 일본은 우리에게 누구인지, 우리는 그들에게 누구인지를 새삼 되묻게 되는 요즘이다. 내일신문, 2019. 8.7

 


유머의 정치 산문

정치판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증오와 막말뿐이다. 정치란 어차피 반대와 대비되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책의 마주침이라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그 갈등의 양상이 극단으로 향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한 야당의 원내대표가 정권을 향해 조양은 세트로 나라가 온통 엉망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의 수석 조 모씨와 80년대의 대표적 조폭 양은이파, 대통령의 측근 양 모씨, 북한의 김정은의 이름자들을 조립해 붙인 이름이다.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만 창의도 풍자도 아닌 매우 조야한 비유이다. 그리고 소통이 어렵다는 대통령을 겨냥해 한센병환자로 비유하거나 여당 대표가 야당을 향해 도둑놈들한테는 국회를 맡길 수 없다고 하거나 한 야당 대표의 5·18 기념식 참석과 관련하여 거의 사이코패스 라고 몰아붙인 사례는 과거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 틀어막아야 할 사람” “등신 외교”, “노가리” ‘쥐박이같은 언어폭력의 연장이다. 이쯤 되면 가히 원색적인 말의 아수라다.

우리 정치판이 언제부터 이리 살벌해진 것인지, 현실을 객관화하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유머와 풍자 넘치는 세월이 우리에게도 있었던가 싶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사례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현실의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은 유머가 우리에게 주는 일상의 활력이었다.

처칠이 대기업 국유화를 주장하던 노동당과 싸우고 있던 무렵의 어느 날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 갔다. 라이벌인 노동당 당수가 볼일을 보고 있었고, 빈 자리를 놔 두고 그는 기다렸다. "옆자리가 비었는데 왜 거긴 안 쓰는 거요? 나에게 불쾌한 감정이라도 있습니까?" 노동당 당수가 물었다. 처칠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단지 겁이 나서 그러는 거요. 당신들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를 하려 드는데, 내 것이 국유화 되면 큰일이지 않소?" 김대중이 사형수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아내가 그의 면전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노라고 기도했다. 훗날 김대중은 자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그때의 아내가 가장 섭섭했노라고 회고했다.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 기자가 묻자 김종필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말로 하면 혁명이고 외국어로 하면 하면 쿠데타야.” 노무현이 한 인삼가공 공장을 시찰했을 때 그곳 주부 사원이 대통령에게 '풍기 홍삼이 남성 정력에 최고라고 권하자 대통령은 펄쩍 뛰며 '집사람에게는 그런 소리 마세요. 매일 이것만 먹으라고 하면 큰일입니다'라고 했다. 73세 고령의 대통령 재선 도전자 레이건은 먼데일 민주당 후보(당시 56)로부터 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레이건은 대답했다, “이번 선거에서 나이는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다그치자 레이건은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한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받아쳤다. 공수처를 야당이 반대한다고 하자 노회찬은 대답했다. 동네에 파출소를 새로 만든다고 하면 우범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반대가 극심하다고 덧붙이자 노회찬이 물었다.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에프킬라를 안 살 겁니까?

그들이 구사한 유머는 촌철살인이었고 삶의 지혜였고 풍자였고 너스레였다. 우스개는 생의 이쪽과 저쪽을 훔쳐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익살이고 넉살이고 엄살이다.

우리가 연출하고 있는 오늘의 이 비속한 풍경들은 좀더 제한되고 편집되어야 한다. 중간 색을 허락하지 않는 오늘의 흑과 백의 찬반 논리부터 지양되어야 한다. 갈등이란 너와 나 갑과 을을 이어주는 통로이며 과정이다. 갈등의 순기능이 필요한 때이다. 갈등은 다양성과 이질성에의 용인, 획일성에 대한 혐오의 정신이다. 갈등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화쟁에 이르는 통로로 기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유머는 대립을 초월하는 거리두기이다 흉기로 둔갑한 오늘의 우리들의 정치 언어는 좀더 표현적이어야 한다. 유머의 정신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복원하고 그리워해야 할 정치적 덕목이다. 내일신문, 2019.7.12


윤길중, 상처의 옹호 갤러리

 윤길중, SeeSaw bo 19-heels, 45x45cm, 2018

윤길중의 사진전 오브제 -소멸과 재생이 대구(루모스,2019.6.15-7.14)와 서울(류가헌, 8.6-18)에서 잇달아 열린다. 이 전시는 지난 봄 강원도 고성 일대의 산불이 창작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번에도 바람을 타고 산과 마을을 할퀴고 지나간 재난의 흔적들에 주목했다타버린 숲과 마을, 일상의 열락과 평화의 동반자였던 집과 생활도구들의 훼손되고 왜곡된 모습, 주인 잃은 집기와 애장품들작가는 그 불행한 오브제들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재해로 수명을 다한 사물들의 모습들은 그러나 작가의 위무의 앵글 샷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호출, 재현되고 있다. 작가는 그동안 일관되게 헐리고 무너진 집터나 황폐한 공간들을 주목했다. 휘어지고 부러진 나뭇가지, 꺾이고 시들어버린 한 송이 꽃, 쓰러져가는 돌담 사이의 이끼, 무너져 내리는 벽의 균열과 그 사이의 곰팡이 같은 마모되고 스러져가는 일상의 소멸, 파손, 훼손, 왜곡들에서 자신의 심미적 오브제들과 만난다.

그의 작업은 현재의 형국에서 과거의 이미지나 본질을 기억하도록 유도한다. 그리하여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보는 것과 보이는 것들 사이에 숨어있는 사물의 존재의미나 가치를 묻는 작업으로서의 프린트와 리프린트를 반복한다.

작가의 가난과 병고 체험이 그의 심미적 이상에 가담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가 형상화해 낸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연대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특히 훼손 왜곡된 육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눈은 이미 기법적 차원을 넘어선 것 같다. 이 작가의 세계인식이 인간에 대한 존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은 이미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아름답다(2015)전에서 확연히 보여주었다. 장애를 지닌 이들의 왜곡 훼손된 육체와 삶이 보여준 화해와 조우, 슬픔과 환희의 뒤엉킴들은 아름다웠다.  

이번 전시에 걸린 타버린 붉은 구두 한 짝은 거칠게 마모되어 배열된 검은 부장물의 색조와 잘 대비되어 있다. 프린트와 리프린트가 교직된 바탕 위에 놓인 적과 흑의 외짝 신발은 그 검은 색의 절망과 진홍빛 정념이 극명히 대비되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고조시켜준다. 작가는 타버린 구두 주인의 행방이나 그와 함께 그 구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상상의 공간까지도 넉넉히 마련해 주고 있다.

훼손 왜곡된 형과 색은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피사체의 꿈의 형상들을 기억하게 해 준다인간과 사물들의 장애나 상흔들에 대한 옹호는 결국 드러난 형국보다는 기억해야 할 가치들에 대한 희구일 것이다. 윤길중의 사진들은 바라보기보다는 읽어내기에 좋은 것들이며 아파하다가 마침내 동행하게 되는 치유의 방식이다. 그가 찍은 것은 결국 모든 본래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원망이다. CULTURA, 2019.07



증오의 정치 산문

정치판이 수상하다.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요즘 더욱 심하다. 다소 경멸적으로 씌일 수밖에 없는 지금의 정치판이 놀랍고 안타깝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언어적 표현이나 서술적 담론들에 드러난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행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것 같다.

오늘의 정치판에 오가는 구호나 주장이나 진술들은 거의 판단을 거치지 않은 명제이거나 개인적인 감정의 분출, 혹은 집단적 증오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과거의 구호나 주장들이 차라리 고전적이고 순수하고 품격 있는 표현들로 격상되고 있다. 골방도 아닌 교회에서 대통령을 향해 이, , 저에 x을 붙이고 청와대를 폭파하자고 소리치며 한센병환자에 비유한다. 달창이나 문노스는 그 유래가 매우 어려운 비속어의 조합으로 모두 대통령을 비하하는 은어이다.

언어가 의미전달이 아니라 살상무기로 둔갑하고 있다. 계층이나 학력,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거칠고 폭력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도 또한 놀랍다. 이렇듯 증오에 기초한 정치판의 언어폭력 현상은 지금 우리 사회의 비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한 시대의 언어나 문학 작픔은 그 시대의 사회적 현상을 그대로 담보한다. 언어적 어투는 사회적 어투를 닮기 마련이다.

언어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의 상호성은 수많은 문학적 사례와 그 해석적 근거에서 입증된다. 외적의 침범이 잦았을 때나 전쟁을 겪은 후에는 문자생활에 변화가 왔둣, 식민체제가 심화되던 때에는 유독 역사소설이 유행했다. 탄압과 감시는 이 땅의 작가들에게 현실 문제를 포기하고 과거의 속으로 스며들게 했다. 식민시대의 작품들에 나타난 비유와 상징, 풍자와 아이러니와 같은 문학적 표현의 풍요로움은 정치탄압과 시대적 억압이 낳은 결과였다. 직설이 허락되지 않은 억압된 사회, 군부 독재 하에서의 언어적 탈출구가 상징이나 기호 우화나 암호였음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처럼 문화적 어투와 사회적 어투의 상호성은 그 정도나 방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명제일 것이다. 사회적 담론이나 문학적 묘사가 한 개인의 재능이나 개성의 표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듯이 그 또한 그들이 속해있는 집단의 자화상이라는 논리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시대의 언어는 그렇다 아니다의 논의를 떠나버린 하나의 폭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화자와 청자의 마주침이나 주고받음이 아니라 다만 화자만이 일방적으로 존재한다. 언어는 진실을 감추거나 위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며 정치적 동맹이나 조약은 원활한 파기를 위한 예비 장치로 존재한다.

독재자의 후예가 누구인지, 통합을 위한 사례가 어떻게 분렬의 사례로 오도되는지를 되물어야 하는 오늘의 정치판의 저급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거쳤던 전쟁과 항쟁과 혁명의 체험이 가져다 준 환멸 때문인지도 모른다. 6.25 전쟁은 우리에게 인명살상과 폐허보다 더 깊고 높은 사상적 멍에를 씌워주었으며, 4.19의 환희는 5.16의 쿠데타로 이어졌으며 6.10항쟁은 합법적군사정부를 헌납했고 민주 참여정부는 부패와 무능 정권으로 이어졌다.

폭력과 혐오의 언어로 치닫는 오늘의 증오의 정치 행태는 촛불혁명의 어떤 후유증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악과 싸워야 하는 혁명의 본질을 정면으로 위반한 쿠데타세력이나, 항쟁과 폭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신군부 옹호 세력들의 역사부정은 새로 등장한 적폐이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민주화, 세속화, 개체화를 추구하고 그쪽으로 변화해 간다고 해도 그것으로 오늘의 정치판의 천박성이나 폭력성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적절한 비유나 풍자는 경이롭지만 걸러지지 않은 욕설이나 어휘의 나열은 폭력이다. 표현적이지 않은 담론이나 명제는 비문이다. 새로운 이념이나 정치질서의 등장을 두려워 하는 세력들을 경계해야 한다. 내일신문, 2019.6.10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