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다리의 마임극 산문

남북이 만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민족의 공동번영과 미래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과거의 합의는 조속히 실천에 옮기는 한편 남북 철도를 연결하고 이산가족의 상봉 추진은 물론 일체의 충돌과 적대행위를 금하고 특히 핵 없는 한반도를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노력해나가자는 등의 합의문이었다.

남북은 이제 각각 따로 재깍거리던 서울과 평양 두 개의 시계를 하나로 맞추기로 하였으며, 철조망 너머로 마주보던 확성기를 떼 내고 양국 정상 간의 직통전화도 개설하였다. 북미는 북미대로 핵단추를 누가 크게 누를지 두고 보자던 태도가 급변, 억류했던 인질을 풀어주고 전세기로 실어오고 판문점에서 만날까 상그리라에서 만날까 고민하는 사이 핵 실험장 폐기를 위한 갱도 폭파 현장을 참관하라는 통보가 뒤를 이었다. 그 사이 한미 군사훈련과 미측 강경론자들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는 있지만,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변화다.

이 상황은 427일의 이른 오전 남북의 두 정상이 처음 만나 악수하고 잡은 손을 끌어당겨 번갈아가며 남북의 군사분계선을 무단 월경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면서부터 이미 예고되었다. 그동안의 시행착오 때문일까. 이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2018년의 봄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 사실로 굳어지지나 않을지 두렵기 조차 한 계절이다. 믿지 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조차도 비현실적으로 고맙기만 하다. 간밤에 내린 함박눈처럼 거짓말처럼 도둑처럼 봄은 왔고, 지금 녹음은 짙어가고 있다.

그 날 사월의 마지막 금요일,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도보다리에서의 두 정상의 산책 장면은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이 봄날의 또 다른 진경이었다. 그 도보다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곳은 바로 오래전 명명된 소떼 길의 길섶이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각인된 과거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 해 유월의 남쪽의 한 재벌 회장의 소떼 방북은 전쟁과 평화와 이데올로기 모두를 한 줌의 바람으로 날려버린 사건이었다. 소떼 500마리를 실은 트럭의 기다란 행렬의 선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 땅으로 향하는 밀짚모자 속 실향민 노인의 검게 탄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다. 어릴 적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훔쳐 들고 고향을 떠나온 그가 성공하여 서럽고 애잔한 그 빚 갚기 위해 그리운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분단시대의 영상이었다. 그 장면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의 퍼포먼스이자 어느 미래학자의 표현대로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 이를 만한 것이었다.

소떼가 지나갔던 20년 전의 그 깊섶 도보다리에서의 두 남자에 대한 30분간의 무성 영상은 한 편의 마임극이거나 단편영화였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드나드는 요원들의 동선을 줄이기 위해 습지 위에 만들었다는 그 다리가 마침내 남북의 동선을 줄이는 다리로 바뀌어가는 순간이었다. 배석자가 사라지고 기자와 카메라가 물러서고 움직임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카메라는 서서히 줌 아웃으로 밀려났다. 멀리 야트막한 산등성이에는 사월의 연두색 초목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주위에 들리는 것은 오직 새소리와 바람 소리 뿐, 나란히 한 두 남자의 어깨는 가끔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한 쪽은 설명하고 한쪽은 듣는 모양새였다. 한쪽이 말하자 한쪽이 안경을 고쳐 세웠고 한쪽이 손을 흔들자 다른 한쪽이 웃었고 한쪽이 웃자 다른 한 쪽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들은 순간순간 상대방의 머리 위를 스치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엿듣는 듯했다가 망연히 한 곳에 시선을 멈춘 채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마임극이기도 하고 무성영화이기도 한 도보다리의 롱 테이크는 장면이 의미에 가담하는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풍경 속의 두 남자는 조금은 고즈넉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들이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무슨 얘기를 하였는지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2018년 봄 도보다리에서의 두 남자의 이야기는 세월 흘러도 마임극으로 남겨둘 일이다. 길을 말하거나 이름을 명명하는 순간이야말로 그 길과 이름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되고 비현실적인 이 봄이 믿을 수 없이 즐겁고, 그림처럼 왔다가 음악처럼 흐르는 이 봄의 반란이 가슴 설렌다. 내일신문, 2018.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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