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의 시간 산문

6.13 지방 선거에 참패한 야당이 원인규명과 위기탈출 방안에 고심하고 있다. 리모델링인지 재건축인지 모를 사태로 이어지는 각 당의 요즘의 풍경은 하도 자주 반복되는 것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심사는 이제 씁쓸하지도 우습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때마다 정치란 무엇인가 새삼 되묻게 되고 나와 우리가 사회와 역사 속으로 어떻게 편입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타고온 버스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지금 가고 있는 속도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다시 자문하게 된다.

야당의 참패에는 저마다 이유도 많고 치유방법도 백가쟁명이다. 한 야당은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무능 부패 정권의 몰락을 자신들과 분리해서 선거에 임하는 우를 범했다. 무엇보다도 일부 당직자가 보여준 일련의 정치적 행보나 발언들은 시대착오적이었고 군부독재 시절의 정치 사회적 관습에 자신을 가둬버린 현실인식 방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 일부의  정치적 발언은 자신들의 품격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념과 신념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보수와 수구, 친북과 종북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당적을 같이 했던 또 다른 두 야당은 자신들이 왜 갈라서야 했는지에 대한 명분도 철학도 제시하지 못한 채 적폐와의 연대와 단일화를 얘기했다. 촛불 정국을 이루어낸 정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던 그들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국정농단과 비리정권의 누더기를 걸쳐 입은 이 거대야당은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 진보도 보수도 혁신도 아닌 또 다른 야당 역시 응급실에 누워 수혈을 기다리고 있다. 다급해진 그들은 여기저기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아예 자신들을 도와즐 책사들을 호명하고 있다. 청년 실업을 걱정하고 업무를 기획해야할 그들 자신에게 때 아닌 일자리가 창출된 셈이다. 세간의 책사로 분류되는 몇몇 인사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구원투수로 입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고 자신들의 정권을 탄핵했던 인사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심지어는 정치와는 무관한 유명 의사를 비대위원장으로 거론하는가 하면 아예 자신의 당과는 수혈 불가능한 혈액형의 학자를 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자고도 했다. 전문적인 의술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 학자의 지식에 그들이 현혹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이 구애는 지금의 그들의 절박함이 어떠한 지경인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기술이나 지식이 언제나 지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지혜야말로 경험의 축적물이요 그것은 지식과 식견의 차이만큼 중요한 덕목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타게 찾고 기다리는 멘토의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쓴 사도의 계시록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예언가의 점괘라도 받아 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전장의 장수처럼 자신을 도와줄 책략가를 다시 삼고초려 하겠다는 것인가.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폭력과 전쟁의 황폐를 시대 배경으로 플롯도 스토리도 무대장치도 없이 황량한 한 그루 나무그늘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들은 다만 고도씨를 기다리는 것으로 아득하게 앉아있다. 그들의 하는 일이란 고도가 올 것을 믿는 일과 무연한 수다로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도는 오지 않았다. 고도는 다만 그들의 기다림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선지자인지 구원자인지 극중의 기다림의 대상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상황의 완고성과 지속성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처한 희망과 절망의 역설적 병행원리이다..

멘토는 오지 않는다. 그는 전쟁터에 나간 친구의 아들을 아비처럼 스승처럼 보살펴주고 사라진 신화 속의 이름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진정한 멘토는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의 손님, 새로운 어떤 신념이나 가치이어야 할 것이다. 내일신문, 201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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