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념과 현실 산문

지난 연말 문득 한 권의 책이 배송되었다. 벽초 홍명희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것이었다. 아 이 사람 아직도 갖바치와 함께 구월산을 누비고 있구나싶었고, 오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는 외우 채진홍 교수가 일찍이 임꺽정으로 학위를 할 때부터 야심을 드러낸 터여서 그리 놀라운 분량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한 산도적을 추적하는 저자의 관심은 일관되고 열정은 넘쳐났다. 임꺽정은 앞 시대의 홍길동이나 뒷시대의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대도로 꼽힌다.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서에는 정작 한두 줄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있었던 일들의 역사와 있을 법한 일들의 문학이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유로운 상상력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의 홍명희의 소설에 발견되는 이념이나 기법을 작품 내적 원리의 규명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생애와 관련지어 그의 소설과 사상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었고 그 의미는 강렬했다.

남북 정상이 올해 들어 세 번 만났다. 그것도 아메리카합중국 정치꾼들이 늘 머리 아파하는 판문점과 평양에서.”로 시작되는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미 논거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었다. 저자는 해방이후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때 홍명희만큼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간절히 원하고 주장했던 대표적 인사는 없었다고 꼽았다. 그는 일제가 패망한 8.15를 우리민족의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미소의 점령사건이라는 홍명희의 관점에 주목했다. 미소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국제적 형세임을 홍명희는 간파했다는 것, 그리하여 해방의 감격을 또 다른 비극의 씨앗으로, 6.25를 그 정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미소가 지금은 미중으로 바뀌어졌을 뿐이라는 첨언도 곁들였다.

정치적 이념과 문학적 신념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홍명희만큼 개인사와 시대사가 일치하는 경우도 드물다. 이는 부친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자결한 가족사에서보다도 임꺽정에 촘촘히 배어나는 민족 정서와 민중적 삶, 반봉건 민족자결의 상징구조들에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홍명희의 독립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3.1운동에 열결되고 민족통합운동은 신간회로 나타나며 좌우대립을 지양하고 미소의 영향을 벗어난 남북통일정부수립에의 열망으로 이어진다.

벽초는 육당 춘원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문사로 거명되던 인물이었다. 춘원과 육당의 친일, 훼절은 급진개화와 무비판적 서구수용의 결과물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홍명희의 합리적 외세대응은 의문의 북한 체류로 이어진다. 김구와 조만식과 홍명희는 신탁과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각각 출생지인 북과 남의 반대편에서 암살 총살 혹은 의문의 말년을 보낸다.

식민지배하에서 과거를 되새김하는 일은 아픈 현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여기가 아닌 그때/거기,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시대로의 도피는 그대로 당대 현실에 대한 소망적 사고의 표현이었지만, 소설이 현실과의 대응에서 오는 당대적 양식이라는 점에서 과거로의 후퇴는 작가의식의 부재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이야기가 흥행하는 오늘이란 당면한 현실이 얼마나 조야한 것인가를 반증한다. 조선 중기의 산도적의 얘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홍명희의 현실과 불과 한 세기 전의 김구와 조만식과 홍명희를 되새김하는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유사한가는 시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미를 둘러싼 시대상황과의 조응에서 닮아야 할 것과 닮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어제에 관한 얘기는 내일을 위한 것이어야한다. 오늘은 늘 어제의 산물이었음을 지각하는 능력과 자질이야말로 내일을 예비하는 지혜일 것이다. 연말정산서처럼 문득 배송된 한 권의 문학론에서 새삼 한국 근현대의 혼돈과 갈등을 다시 만나게 되는 새해, 선인들의 이념적 거취와 정치적 좌절에서 절망 아닌 희망을 보는 새아침이다. 내일신문, 2019.1.7


덧글

  • 지니 2019/01/07 15:59 # 삭제 답글

    '아메리카 합중국 정치꾼들이 머리아파하는'
    책을 안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부분이로군요. 캬! 우리민족끼리의 뽕이 차오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