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정치 산문

정치판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증오와 막말뿐이다. 정치란 어차피 반대와 대비되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책의 마주침이라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그 갈등의 양상이 극단으로 향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한 야당의 원내대표가 정권을 향해 조양은 세트로 나라가 온통 엉망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의 수석 조 모씨와 80년대의 대표적 조폭 양은이파, 대통령의 측근 양 모씨, 북한의 김정은의 이름자들을 조립해 붙인 이름이다.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만 창의도 풍자도 아닌 매우 조야한 비유이다. 그리고 소통이 어렵다는 대통령을 겨냥해 한센병환자로 비유하거나 여당 대표가 야당을 향해 도둑놈들한테는 국회를 맡길 수 없다고 하거나 한 야당 대표의 5·18 기념식 참석과 관련하여 거의 사이코패스 라고 몰아붙인 사례는 과거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 틀어막아야 할 사람” “등신 외교”, “노가리” ‘쥐박이같은 언어폭력의 연장이다. 이쯤 되면 가히 원색적인 말의 아수라다.

우리 정치판이 언제부터 이리 살벌해진 것인지, 현실을 객관화하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유머와 풍자 넘치는 세월이 우리에게도 있었던가 싶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사례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현실의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은 유머가 우리에게 주는 일상의 활력이었다.

처칠이 대기업 국유화를 주장하던 노동당과 싸우고 있던 무렵의 어느 날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 갔다. 라이벌인 노동당 당수가 볼일을 보고 있었고, 빈 자리를 놔 두고 그는 기다렸다. "옆자리가 비었는데 왜 거긴 안 쓰는 거요? 나에게 불쾌한 감정이라도 있습니까?" 노동당 당수가 물었다. 처칠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단지 겁이 나서 그러는 거요. 당신들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를 하려 드는데, 내 것이 국유화 되면 큰일이지 않소?" 김대중이 사형수로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아내가 그의 면전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노라고 기도했다. 훗날 김대중은 자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은 그때의 아내가 가장 섭섭했노라고 회고했다.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 기자가 묻자 김종필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말로 하면 혁명이고 외국어로 하면 하면 쿠데타야.” 노무현이 한 인삼가공 공장을 시찰했을 때 그곳 주부 사원이 대통령에게 '풍기 홍삼이 남성 정력에 최고라고 권하자 대통령은 펄쩍 뛰며 '집사람에게는 그런 소리 마세요. 매일 이것만 먹으라고 하면 큰일입니다'라고 했다. 73세 고령의 대통령 재선 도전자 레이건은 먼데일 민주당 후보(당시 56)로부터 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레이건은 대답했다, “이번 선거에서 나이는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다그치자 레이건은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한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받아쳤다. 공수처를 야당이 반대한다고 하자 노회찬은 대답했다. 동네에 파출소를 새로 만든다고 하면 우범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반대가 극심하다고 덧붙이자 노회찬이 물었다.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에프킬라를 안 살 겁니까?

그들이 구사한 유머는 촌철살인이었고 삶의 지혜였고 풍자였고 너스레였다. 우스개는 생의 이쪽과 저쪽을 훔쳐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의 익살이고 넉살이고 엄살이다.

우리가 연출하고 있는 오늘의 이 비속한 풍경들은 좀더 제한되고 편집되어야 한다. 중간 색을 허락하지 않는 오늘의 흑과 백의 찬반 논리부터 지양되어야 한다. 갈등이란 너와 나 갑과 을을 이어주는 통로이며 과정이다. 갈등의 순기능이 필요한 때이다. 갈등은 다양성과 이질성에의 용인, 획일성에 대한 혐오의 정신이다. 갈등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화쟁에 이르는 통로로 기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유머는 대립을 초월하는 거리두기이다 흉기로 둔갑한 오늘의 우리들의 정치 언어는 좀더 표현적이어야 한다. 유머의 정신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복원하고 그리워해야 할 정치적 덕목이다. 내일신문, 201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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